이 글은 1950년대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북한 음악계에서의 ‘탁성(濁聲, 쐑소리)’에 대한 논의의 양상과 지향을 『조선음악』에 수록된 글을 중심으로 검토해본 글이다. 월북국악인들이 만든 창극 노래에서 들리는 ‘쐑 쐑’ 거리는 탁성은 1951년부터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하여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전후복구과정기간에 본격화되었다. 1950년대 전반기에는 양악계를 중심으로 판소리어법으로 연행되는 창극과 고전 음악 유산에서 보이는 탁성의 양상을 세 가지로 범주화하였으며, 미학적으로 아름답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과학적으로 변형된 창법임을 명시하였다. 이러한 탁성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는 남녀의 성부를 분리시키고 과학적 발성법에 의한 발성 훈련을 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하여 월북음악인들은 탁성을 없애면 민족 음악의 맛을 잃게 되기 때문에 민족적 질을 보장할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1956년 8월의 종파투쟁으로 인해 월북음악인들은 그 이전과는 달리 수세에 몰리던 시기에 재북음악인은 민요스타일의 창극인 <배뱅이>(19 58)를 창작하였다. <배뱅이>에서는 기존의 판소리스타일 창극에 요구되었던 남녀성부 분리와 함께 민요에서도 보이는 탁성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1959년부터는 탁성 제거에 대한 논의가 격화되면서 보수성의 아이콘인 탁성은 무조건 제거되어야 하며 “조선 맛을 맑은 소리로” 내는 것으로 기울어 갔다. 그리고 1960년에는 탁성제거와 남녀 성부 분리를 위한 방법에 대하여 완전한 의견의 합치를 보았다고 천명하게 되었고 1962년 완전히 탁성이 제거된 창극 <홍루몽>을 올림으로써 북한의 탁성 논쟁은 탁성 제거로 귀결되었다. 결국 월북 후 15년 정도를 유지했던 월북음악인들만의 스타일은 음악대학의 학생들에게 전수되지 못하였으며, 음악대학의 학생들은 당시 천리마운동 시기의 시대적 조류 속에서 창극에서의 탁성 제거 문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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