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memories)은 주체의 경험이 비가시적인 형태로 생성, 배열, 간직되므로 경험의 저장고에 해당한다. ‘기억의 환기’는 지나가버린 사건이나 삶의 양태 및 인식, 태도, 신념, 믿음, 가치지향 등의 비가시적인 문화 양상들을 현재로 불러내어 살아 생동감 넘치게 만드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초기 세대일수록 이주와 적응, 생활사에 대한 기록의 가능성은 더 희박하므로 심층 면담에 의한 기억의 환기 방식이 연구 방법론으로서 유효하다. 심층 면담에 의한 구술생애사의 기록과 해석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주와 적응, 생활사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연구전략이다. 본고에서는 두만강 접경지역 한 조선족 여성 노인의 삶을 세 딸의 도움을 받아 기억의 환기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조선족 디아스포라 경험과 생활사적 함의를 살펴보았다. 구술자의 본가와 시가 선조들은 일제 강점기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 연변의 용정과 도문 일대에 각각 정착했다. 그녀는 용정 석정촌에서 태어나 광석촌으로 이주 후 결혼해서는 조양천 시가에 살면서 광복 전후 시기의 삶을 경험했다. 1960년대 초에는 북한 이주와 탈북 귀향 후 돈화시로 이주하여 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구술자의 가족사를 관통해서는 봉건 전통주의와 일제 식민주의, 중국 사회주의의 중첩된 역사적 맥락이 녹아들어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조선족사회도 이제 전통적 생활양식의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1970년대까지 지속된 문화대혁명과 1980년대 이후의 개혁개방정책 및 한ㆍ중 수교에 따른 조선족 대이주는 이러한 변화를 추동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집거 형태의 조선족 마을의 공동화는 머잖아 민족문화의 흔적까지 지우고 말 것이다. 초기 이주 세대가 자연 사멸하기 전에 서둘러 이들로부터 디아스포라 경험과 기억을 추수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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