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러시아 군사 대표단 방북…北대표단 방러 답방 차원인 듯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이은정 기자 = 북한과 러시아가 군사 분야의 고위급 교류를 지속하며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6일 빅토르 고레미킨 러시아 국방부 차관 겸 연방무력 군사정치총국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전날 평양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뉴스] 북러, 평양서 軍차관급 회담…"군 정치기관 협조 토의"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북한과 러시아의 군내 정치사상문제를 담당하는 군부 차관급 인사가 평양에서 만나 군 정치기관 간 협조 문제를 논의했다.
북한군의 러시아 추가 파병 동향이 감지되는 가운데 관련 논의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5일에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대표들과 러시아 대표단 간 회담이 열렸다고 7일 전했다.
[뉴스] '北외교 원로' 김영남 사망…평창올림픽때 대표단장 방남(종합2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걸쳐 북한 외교에서 중책을 맡았던 김영남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3일 사망했다.
조선중앙통신은 4일 "우리 당과 국가의 강화발전사에 특출한 공적을 남긴 노세대 혁명가인 김영남 동지가 97살을 일기로 고귀한 생을 마쳤다"고 부고를 전했다.
[뉴스] "유니세프·WHO, 다음달 북한에 국제인력 파견…코로나 후 처음"
유엔아동기금(UNICEF·유니세프)과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처음으로 북한에 대표단을 파견할 예정이라고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 NK뉴스가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뉴스] 日언론 "北통역원, 8월 하순 몽골서 韓대사관 통해 망명"
태형철 북한 사회과학원장이 이끄는 북한 대표단이 지난 8월 하순 몽골 울란바토르를 방문했을 당시 북한 통역원이 한국대사관을 통해 망명했다고 일본 교도통신이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25일 보도했다.
[사회/문화]
...데려다 실기를 시켜보니 농촌 여인의 소박한 품이 좋았다. 영화는 남북 현실을 주제로 한 것이어서 시대상으로도 적절한 작품이었다.
김원주와 박학은 해방 전 서울에서 깊은 사이는 아니라도 좌익운동으로 알던 사이였다. 1948년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연석회의에 박학은 김일성의 초청으로 참가했다, 평양 출신이라 그대로 눌러앉았고 김원주는 남조선민주여성 대표단으로 참가했다. 그런 인연도 있었지만 김원주는 노동신문 국제면 편집주간으로 여성 최초로 신문편집의 실력자였다.
김현숙(1953년), 우인희(1956년), 성혜림(1958년)은 거의 같은 시기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우생활을 시작해서 서로 의지하는 친근한 사이였다. 오랜 선배들인 문예봉, 김효정(오병초의 전처)들이 김정일의 퇴출로 철도연극단으로...
[통일/남북관계]
...총 30년을 공적 기관에서 보냈다.
공적 기관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통일 화두’를 줄곧 탐구하면서 남북 관계 진전을 위한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노력을 하고자 하였다. 북한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하면서 기회가 되는대로 북한을 직접 현지 체험도 하였다. 새로운 남북 교류협력의 장을 열어 확대하려고 했다. 인도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인 북한 주민들을 위해 동포애적 마음으로 대북 인도적 지원도 하였다. 남북 당국 간의 주요 현안 과제를 풀기 위해 남북회담 대표단으로 참여하여 북한 측과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하였다. 남북한 간 위기가 발생했을 때는 이를 극복하고자 다각도로 노력을 다하였다. 남북 관계가 급진전될 때는 통일이 성큼 다가올 것 같은 희망과 흥분에 쌓이기도 했지만, 남북...
[정치/군사]
...고안된 용어라는 이유에서다.
망원경으로 살피고 현미경으로 뜯어보고
지은이는 역사의 큰 흐름을 살피면서도, 당시의 주소 북한대사 이상조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사건의 추이를 세밀하게 추적한다. 이를테면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연설, 폴란드의 포즈난 폭동, 중소분쟁 등 국제적 사태가 이 사건의 추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피는 ‘망원경식’ 조망이 그 하나이다. 그렇게 해서 김일성이 스탈린주의 비판을 어떻게 피해 갔는지, 당초 공동대표단을 파견해 김일성 견제에 나섰던 중국과 소련이 나중에는 왜 북한 망명객들을 외면하기에 이르렀는지가 설명된다. 그런가 하면 사건의 내밀한 전개를 촘촘히 뜯어보는 ‘현미경식’ 서술도 놓치지 않는다. 비판세력이...
[정치/군사]
...일만 남았다. 2년간 벌어진 협상 기간 동안 쌍방의 방어선에는 약 20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집중 배치되었다. 저자의 진술에 따르면, 정전협정의 각 조항이 협의되거나 심지어 글자 하나에 대한 논쟁까지 그 모든 결과가 전 세계에 순간적인 절망과 희망을 안겨다주었다.
1951년 7월 10일,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공식적으로 개시되었다. 양측 대표단이 모인 곳은 내봉장. 중국인들에게 봉황이 날아온다는 것은 곧 환영의 뜻이었다. 정전협정이 정식 서명된 시각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협정의 서명 이후 12시간이 지나 정식 발효한다는 조항 때문에, 서명 뒤 12시간 동안 전체 수백 킬로미터의 전선에서는 여전히 천지를 뒤흔들 정도의 총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흡사 새로운 대전투가 시작되는...
[법/인권]
...3월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에 참석해 비팃 문타폰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과 면담했다.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은 2004년 유엔인권위원회(유엔인권이사회의 전신)가 채택한 북한인권결의에 근거해 마련된 제도다. 킹 대사는 또한 유럽연합 및 일본 대표단과 만나 북한인권 결의안 초안 작성을 논의하고, 여러 국가 대표들과 만나 결의안 투표에 찬성해 줄 것을 독려했다. 2010년 4월에는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둔 유럽연합 및 유럽의회 관계자들과 만나 북한인권을 둘러싼 미국과 유럽연합의 협력을 다졌다.
2010년 11월 23일에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4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이 한국의 민간인 거주지역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반기문...
[학술논문] 1950년대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와 문화 교류: 1956년 조선 문화 대표단의 활동과 관련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양국 관계가 발전하게 된 배경과 과정에서 문화 교류가 담당했던 역할을 1956년 말 평양에서 하노이(Hà Nội)로 파견된 조선 문화 대표단의 활동과 관련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1950년부터 형성된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는 한국전쟁과 공식적인 외교관계 확립을 계기로 공고해지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점차 깊어지게 된 양국의 유대감은 북한이 북베트남으로 대표단과 예술단을 파견하는 양상으로 표출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문화 교류는 1956년 공산 국가들 간의 공조 분위기에서 보다 다채로운 형태로 전개되어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 긴밀해진 북한과 북베트남의 유대 관계는 1956년 말 조선 문화 대표단의 북베트남 방문과...
[학술논문] 대한민국의 건국외교와 유엔(UN)
...밝혔다. 첫째, 미국이 반공보루 구축을 위해 한국을 분단한 것이 아니라 소련이 중국 공산화의 후방기지로 북한을 활용하기 위해 런던외상회의가 열리고 있던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려 분단을 기정사실화 했으며, 광복 이후 6․25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미국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또한 중국의 공산화가 명약관화해진 1947년 9월 이후 미국이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통한 해결로 정책을 바꾼 것도 1946년 정읍선언 이래 이를 먼저 제기하고 요구해온 이승만의 전략을 받아들인 것임을 밝혔다. 둘째,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전문 외교관이 아닌 대표단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팽창일로를 걷고 있던 공산진영의 저지공각을 뚫고 미온적 입장을 보이고 있던 인도와 아랍진영...
[학술논문] The Analysis of the Role of Mongolia among the Korea, Mongol, North Korean Sociocultural Relationship
...한국과 몽골의 녹색에너지 분야에서의 협력과 몽골인들의 한국 이주에 관한 문제 그리고 중간자로서 몽골이 남북한의 사회문화교류에서의 역할을 진단하고 분석 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다. 먼저 녹색에너지 분야에 있어서는 2010년 한·몽 전략대화 제1차 회의에 참석하였던 몽골측 대표단이 한국의 경기도 안산 누에섬 풍력 발전소 현장을 견학하고, 몽골의 쏨(우리의 군)마다 필요한 규모라는 실용성을 강조하면서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노동력, 몽골의 자연환경의 적극적인 협력을 긍정적으로 피력하였다. 두 번째로 본 연구에서는 몽골인들의 한국이주에서 나타나는 갈등의 현상을 몽골에서 사회문제로 집중적으로 다룬 자료를 토대로 화해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진단하였다. 특히 몽골인의 노동 및 결혼 이주를 단순 Migration...
[학술논문] 한국전쟁과 문화(인)의 배치 - ‘적치 90일’의 선전선동사업과 문화공작대 활동
이 논문은 북한의 남한 지역 점령통치 기간에 실시된 선전선동사업에 주목하여, 특히 문화(인)의 동원양상을 『해방일보』를 통해 살펴보았다. 소위 ‘적치 90일’로 알려진 이 기간을 전쟁의 의미화가 진행되는 과정으로 보고, 점령기 미디어와 문화․문학 활동에 나타난 특징을 논의한 것이다. 북한은 전쟁 초기부터 선전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방위적이고 총력적인 선전활동을 실시했다. 북한은 전전 5년간의 문화사업을 바탕으로 선전원-문화선전실-서클사업의 연계 체제를 구축했고, 하부 조직이나 선전원을 선전대상에 따라 분류 배치하였다. 실제 선전활동에 있어 공연예술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소대로 편성되어 지방을 순회할 때는 기동성에 유리한 음악과 무용이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문화예술가들의 동원이...
[학술논문] 6․25전쟁 이전 북한의 평화운동
북한에서는 6·25전쟁 이전부터 세계평화운동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평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북한은 1949년 3월 개최된 평화옹호전국연합대회의 준비를 시발로 전국 각지에서 평화옹호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4월에 개최되는 파리 평화옹호세계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함으로써 세계평화옹호운동에 동참했다. 전쟁 이전 북한 사회에서 평화운동은 국제사회의 평화옹호운동과 달리 반전운동이나 반핵운동의 일환으로 강조되기보다 통일운동의 대중적 실천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북한 사회에서 평화운동은 대중들에게 정부의 통일방침을 교육하고 선전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자 동시에 북한 사회의 일상적 활동을 통일운동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평화운동은 이를 통해서 대중들의 관심과 역량을 통일운동으로 결집해내고, 통일운동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