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발발과 미국의 제7함대 대만해협 파견 발표는, 신생(新生)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 경제적 기반을 흔들었다. 이에 전쟁이 북한에 유리하게 전개되던 한국전쟁 초기, 마오쩌둥은 미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파병하겠다는 스탈린과의 약속을 뒤로 하고, 조기 파병을 적극 희망하였지만, 스탈린의 반대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중국의 출병 결심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심지어 출병을 보류하고 이를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통보하기까지 하였다. 1950년 10월 5일, 중국은 안보위협과 스탈린의 압력을 내세워 출병을 결정하였으나, 스탈린이 즉각적인 공중엄호 및 무기제공에 난색을 표하자 10월 12일에 참전불가를 다시 결정하고 이를 스탈린에게 통보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즉 10월 13일, 미군이 평양~원산에서 진격을 멈출 것이라는 펑더화이의 주장에, 마오쩌둥은 파병을 재차 결정하였다. “싸우지 않고 북한 북부지역을 확보”하여, “국방선을 압록강에서 평양 이북지역까지 확대”할 수 있다는 점이 그의 파병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파병은 조선인민군이 동북지방으로 전면 철수하는 것을 방지하여, 동북이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고 동북지역에 집중된 기간산업을 보호하는 부수적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중국의 파병은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안보적·경제적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었으며, 파병결정 과정에서 소위 ‘혁명 확대’의 목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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