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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해방 이후 평양에 설립된 성화신학교의 역사

A History of Sunghwa Theological Seminary in Pyeongyang

상세내역
저자 고성은
소속 및 직함 감신대학교
발행기관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지 한국기독교와 역사
권호사항 (45)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281-315
발행 시기 2016년
키워드 #배덕영   #38선   #성화신학교   #평양   #서부연회   #반공적인 신학교   #평양신학교   #성화파   #고성은
조회수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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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 논문의 목적은 해방 이후 38선 분단 상황에서 북한 지역 감리교회를 위한 신학교로 평양에 설립되어 1946년부터 1950년까지 5년간 존속하였던 성화신학교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려는 데 있다. 감리교회의 교리적 특색인 ‘성화’를 차용한 성화신학교는 1946년 6월 평양 수옥리에 성화여학교의 교장인 배덕영의 주도하에 태동하였는데, 처음 학제는 예과와 본과였다. 이듬해인 1947년 개최한 기독교조선감리회 서부연회에서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라는 조건하에 서부연회의 잠정적인 신학교로 인준 받은 직후 성화신학교의 학제는 야간부와 고등성경학과(약칭 고성과)가 추가로 설치되었다. 학제가 추가되면서 성화신학교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북한 지역에서 반공적인 신학교로서의 역할을 확연하게 수행하였다. 특히 고성과는 공산주의 교육, 유물주의 교육을 싫어한 가운데 퇴학을 당하거나 자퇴한 18세 이하 학생들에게 배움의 길, 진학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설치한 부설 학과였다. 그런고로 이 학과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반공 신앙을 지닌 학생들이 대거 몰려왔다. 이러한 학생들 때문에 성화신학교는 교파신학교였으나 초교파적인 신학교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처럼 반공적인 정치적 성격을 지닌 성화신학교는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북한 사회주의 정권으로부터 제한과 탄압을 넘어 말살을 향한 수난을 당하였다. 1949년 12월 16일 성화신학교의 교장인 배덕영의 납치로부터 본격화된 성화신학교에 대한 수난은 성화신학교를 폐쇄하고 몰수하는 등 일사천리로 진행된 가운데 결국 성화신학교의 이사장인 송정근이 평양신학교와의 합병에 서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서명이 이루어진 직후인 1950년 2월 성화신학교는 졸업장이 없는 제2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단명한 신학교가 되었다. 두 신학교를 강제 합병하여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이 설립하고 운영한 조선기독교신학교, 일명 ‘김일성신학교’도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폐교를 당하며 신학교육의 종식을 고하였다. 한편, 월남한 성화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은 다양한 교파에서 활동한 가운데 ‘평양 성화신학교 동문회’를 조직하여 끈끈한 결속력을 현재까지 수십년 동안 유지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는 성화신학교 동문들이 성화신학교의 이름을 차용한 ‘성화파’라는 정치 서클을 조직하여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감리교회 정치 지형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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