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한·일 관계정상화로 미국의 오랜 숙원이었던 한·미·일 삼각동맹이 완성됐다. 반면에 사회주의 진영은 중·소 분쟁이 본격화되면서 분열과 갈등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북한 입장에서 볼 때 한·미·일 삼각동맹에 맞서는데 점점 더 많은 자원과 노력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이 와중에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마저 승리한다면 북한의 안보불안은 한층 더 커지게 된다. 따라서 북한에게 베트남전쟁은 단순히 “싸우는 베트남 인민”과 “미제”의 전쟁이 아니었다. 북한에게 베트남전쟁은 궁극적으로는 북한 자신에게 가해질 안보위협을 미연에 막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개입해야만 했던 전쟁이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중·소 분쟁에 적극 개입하며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을 주장하던 북한은 1960년대 중반 들어 베트남전쟁이 과거 한국전쟁처럼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맞대결 성격을 띠게 되자 사회주의 진영의 ‘반제공동투쟁’을 선도적으로 주장하고 전투병 파병에도 솔선수범했다. 하지만 북한의 기대나 바람과는 달리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은 갈수록 심화됐다. 반대로 일본 군국주의는 완전히 부활하자 1970년대 들어서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의 반제공동투쟁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낮추고, 아시아 혁명적 인민들의 반제공동투쟁, 반미반일투쟁을 강하게 촉구했다. 한편 북한은 베트남전쟁 초기 남한에서 반전의식을 매개로 남조선혁명의 기운이 무르익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남한의 반전운동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모험주의적 군사행동 탓에 남조선혁명 가능성이 더욱 낮아지자 박정희 정부와의 대화노선으로 전환했다. 더불어 미군이 1973년 3월 베트남에서 완전 철수하자 7·4남북공동성명의 반외세 조항, 베트남에서 미군의 완전 철수 등을 명분으로 삼아 미국에게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완전 철수 등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동북아시아에서 거의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국가들, 아시아의 혁명적 나라들은 북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열과 갈등상태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남조선혁명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고, 북한은 오히려 박정희 정부를 대화상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국은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요구를 일축했고, 북한이 바라던 주한미군 철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북한이 느끼는 안보불안은 나날이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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