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의 목적은 1954년 제네바정치회담에서 외국군 철수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제기된 배경과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다. 제네바회담은 휴전협정 제4조 60항에 근거하여 개최되었고, 전쟁 시기 휴전회담에서 외국군 철수 문제를 두고 대립하였던 양측이 전후에 정치회담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한 데 따른 것이었다. 협정에 명시된 의제는 ‘한반도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 두 가지였다. 외국군 철수 문제는 휴전 회담에서 공산군 측이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공산군 측은 외국군 철수가 휴전을 보장하는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엔군 측은 외국군 철수 문제를 정치문제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피했으며, 유엔군의 철수는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외국군 철수문제는 휴전회담의 제5의제로 채택된 후 논의과정에서 전후 정치회담에서 다루어질 의제의 하나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협상과정에서 유엔군 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정치회담 관련 휴전협정 조항은 ‘건의’ 정도의 규정력 만을 갖도록 약화되었고, 그만큼 전후 정치회담의 전망도 불투명했다. 휴전 직후인 1953년 10월 26일 정치회담 개최를 위한 예비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양측은 정치회담의 참가주체와 장소, 시기, 의제 등을 논의했지만, 인도를 비롯한 중립국의 회의 참가와 포로문제를 의제로 설정한 공산군 측 주장을 두고 대립했다. 미국은 포로문제를 빌미로 회담을 일방적으로 중단했고, 판문점 예비회담은 아무런 합의도 보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그 후 강대국들의 합의에 따라 1954년 제네바정치회담에서 한국문제를 논의하기로 결정되었다. 회담에는 한국과 유엔참전 15개국(남아공 제외), 북한과 중국·소련 등 총 19개국이 참가하였다. 회담의 의제는 한반도 통일방안이었고, 구체적인 논의과정에서 통일방안의 조건으로서 외국군 철수 문제와 유엔의 지위 문제 등이 쟁점이 되었다. 회담에서 양측은 모두 선거에 의한 평화통일을 주장했다. 그러나 선거방법과 선거 감시문제에서 차이를 보였고, 외국군 철수 문제에서는 유엔군 측이 침략군인 중국군의 우선 철수를 주장한 반면, 공산군 측은 모든 외국군대의 즉각적인 동시 철수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유엔군 측은 한반도 통일 전에 유엔군을 철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유엔참전국 내부에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유엔군 측 주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어렵게 되고, 공산군 측이 유엔의 지위 문제를 적극 제기하자 미국은 서둘러 회담을 마무리했다. 결국 제네바정치회담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다. 정치회담은 휴전회담과 마찬가지로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휴전회담에 비해 타협이나 협상의 여지는 더 적었다. 게다가 정치회담 관련 조항은 반드시 합의해야 한다는 강제력이 없었다. 따라서 참가주체들의 타협 의지와 해결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치회담을 통한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애초에 기대하기 어려웠다. 명목과 달리 정치회담은 이미 결정된 분단을 정착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정치회담에서 외국군 철수 의제가 다루어지는 시기에 전후 동맹구조가 형성되었다. 남한에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그에 근거한 미군 주둔이 결정되었고, 한미동맹이 형성되었다. 외국군 철수를 주장했던 북한 역시 전후에도 중국군이 잔류하였고, 1956년 중국군이 완전 철수한 후에도 1960년대 초 북-중간, 북-소간 동맹조약을 체결하여 동맹구조를 강화했다. 결국 정치회담의 개최 목적인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통일이 아니라 분단구조의 ‘평화로운 관리’를 의미했다고 볼 수 있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