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노식(鄭魯湜)은 판소리 관련 연구자에게 판소리, 창극(唱劇)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다른 한편에서 정노식은 근대 지식인이며, 정치가, 사회주의자 정도로 알려져 있다. 현재 연구서나 자료에서 다루는 정노식 관련 기록은 대개 파편적인 언급들뿐이며,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서술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 때문에 그의 기록들은 마치 각각 다른 인물의 행적을 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정노식은 3ㆍ1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를 저술하는 등의 상당한 활동을 한 데 비해 그의 삶을 세밀하게 다룬 인물론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정노식에 관한 연구는 다른 영역에서 보다 판소리 분야에서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판소리 분야에서의 연구는 정노식이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를 저술하게 된 배경과 과정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주로 그의 생애 중에서 판소리와 관련된 행적에서 그친 것이어서 종합적인 인물론으로는 한계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기왕의 정노식에 대한 평가, 『학지광(學之光)』과 『기독청년(基督靑年)』에 실린 정노식의 기고글, 『조선창극사』의 관련 자료, 정노식이 소장하였던 <퇴별가>의 행방, 신문 기사 등 최대한 관련 자료를 망라하고, 교유관계를 통하여 그의 생애를 재구하려 하였다. 정노식은 전북 김제 만경에서 1891년 출생하였으며, 이후 유년기에는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스무살 무렵인 1911년에는 상경하여 경성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수학하였고, 191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法科)를 다녔다. 정노식은 일본 유학시절 근대 신학문(新學問)을 접하였으며, 이때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를 통하여 장덕수, 현상윤, 이광수, 최남선 등과 교유하면서 계몽주의적 가치관을 정립하게 된다. 정노식은 1919년경 유학에서 돌아온 뒤 3ㆍ1운동에 관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룬다. 그 뒤 1920년대에 장덕수 등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 운동 등 계몽주의 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정노식은 조선청년회연합회가 좌우로 분열되자, 소위 민족주의 진영의 계몽운동에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1920년대 중반 정노식은 고향인 전북 김제의 만경으로 낙향하는데, 이 시기에 정노식은 판소리에 관한 연구에 관심을 갖는다. 정노식에 관련 기사는 1930년대 중반까지 등장하지 않는데, 정노식은 1938년 『조광』에 「조선광대(朝鮮廣大)의 사적(史的) 발달(發達)과 가치(價値)」를 발표하고, 이를 보완하여 1940년 조선일보사에서 『조선창극사』를 출간하면서 그의 면모가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1940년대 이후 정노식의 행적은 급격한 사회주의자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남조선노동당’의 결성에 깊숙이 관여하며, 이로 인해 재판을 받게 되면서 1948년에는 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노식이 북한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정노식은 북한에서 학문적이거나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동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는데, 북한에서는 중앙당에서 주요 요직을 맡았던 것 정도가 확인된다. 정노식의 생애에 관한 연구는 그에 관한 자료가 정리되어 있지 않았으며, 월북이라는 한국사회에서 금기시 되는 이른바 좌익 행적 때문에 답보되어 있는 상태다. 본 논문에서는 정노식과 관련한 자료를 종합하고, 그의 행적과 교유관계를 통하여 그의 생애와 업적을 평가하고자 하였다. 본 논문은 근대 지식인으로서 부각되지 않은 인물인 정노식의 전기(傳記)를 마련하기 위한 시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노식에 관한 자료가 흩어져 있고, 그의 정치적 성향과 행보가 온당치 않다 하여도, 그에 대한 업적이나 평가를 미뤄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앞으로도 정노식을 비롯한 월북 사상가, 연구자, 예술가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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