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발발하여 1950년 10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이 결정 된 후 다양한 중국 화가들이 군인, 작가, 혹은 신문사 기자 신분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전투장면, 진지 내부의 모습, 병사들의 초상, 북한의 풍광 등 전방과 후방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들 중 하공덕(何孔德), 주조명(周祖銘), 조증명(曹增明) 등 인민지원군12군 문예공작단 미술대 (人民志願軍12軍 文藝工作團 美術隊)의 작가들은 사천성미술학원 출신의 젊은 미술가들로 구성되었으며, 마조인(馬兆仁), 손견광(孫見光) 등 지원군 정치부 문화부 (志願軍 政治部 文化部) 소속의 화가들은 중앙미술학원의 미술간부훈련반 출신의 젊은 화가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주된 임무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사기를 진작시킬 연환화를 제작하고 병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이들은 <황계광(黃繼光)>, <양국량(楊國良)> 등 ‘전쟁영웅’의 칭호를 부여받은 병사들의 전장에서의 활약상을주제로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전투기간 중 진지를 방문하여 일반 병사들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미군포로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특히 이들이 그린북한농민과 유격대원의 초상화, 북한 농촌을 그린 풍경화는 1950년대 북한의모습을 기록한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한편 중국문학예술가연합(中國文學藝術家聯合)이 파견한 방조대표단(訪 朝代表團)에는 고원(古元), 나공류(羅工柳) 등 중앙미술학원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작가들이 포함되었다. 이들이 제작한 소묘작품은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人民日報)에 실려 인민지원군의 활약상을 중국 내에 전해주었다. 중국의북한 원조는 정전이 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5차례나 파견되었던 대규모의부조위문단(赴朝慰問團)을 예로 들 수 있다. 위문단에 포함되었단 장조화(蔣 兆和)는 사실적 수묵 인물화를 통하여 전쟁 중에 죽어간 젊은 병사들의 초상을 제작하였다. 중국화가들이 제작한 작품이 전쟁을 시각화한 기록적 측면이 있는 것도사실이나 대부분의 작품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정당화하고 항미원조(抗 美援朝) 운동의 선전을 위해 정치적으로 활용된 측면을 간과 할 수 없다. 신생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에게 한국전쟁은 민족주의 감정의 고양을 통해 국가적 결속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구실과 동력을 제공하였다. 중국은 미국과의첨예한 대립 속에서 일종의 총력전 태세를 구축함으로써 개국 초기 권력의기반을 다질 수 있었으며, 한국전쟁에서 제작된 대량의 작품들은 이러한 신중국 내에서의 미술의 역할을 예시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중국화가들은 전장 체험을 통해 귀국 후 걸출한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정홍류, 하공덕, 주조명 등은 혁명군사박물관 창작실 소속의 화가가 되어 군사관련 소재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대표적 군려화가(軍旅畵家)로 성장하였으며, 나공류, 후일민, 오필단, 고원 등은 전장에서 제작한 소묘를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에 실음으로써 화가로서의 위상을 한층 높일 수 있었다.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창작태도와 사실적 회화 기법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중국 화단에 유행한 사회주의 사실주의 회화 미학에 토대가 되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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