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은 1989년 1월, 자유기업론자로서 적극적으로 ‘북한 열기’를 시도한 첫 방북 이래 10년 후 1998년 6월 16일, ‘세기의 목동’이 되어 소떼 500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넘었다. 그는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에 국내외 환경 변화를 활용하여 공산권 경협을 공론화한 이후 2001년 세상을 뜰 때까지 20여 년간 남북경협-북방경제권을 연동한 길을 뚫고자 일로매진했다. 기업의 실리와 민족사적 명분을 조화시킨 큰 셈법이었다. 그러나 정작 경협이 추진될 무렵 한국경제는 IMF 관리체제 하에 놓였다. 미국은 대북제재까지 가했다. 이 때문에 소떼방북 시 합의한 경협사업 중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만 실현되었다. 남북경협은 세계경제 위기, 남북관계를 정쟁에 활용한 정치권과 보수세력의 근시안, 미국의 대북제재, 현대그룹의 봉건적 경영구조 등 여러 요인이 얽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 모든 문제를 조율하면서 남북경협을 정상궤도에 올려야 할 최종 책임과 권한은 기업에 있지 않다. 정부, 특히 헌법에 따라 “조국의 평화통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선구적’ 대통령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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