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 17일의 북일 정상회담은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평화와 번영의 기초를 세울 것을 약속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성과에 대해서는 일본 국내외의 거의 모든 당국자와 지식인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무엇보다도 일본 국민의 대다수가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을 지지했다. 한편 납치 일본인의 가족들과 반북 운동가들은 ‘납치 문제의 해결 없는 국교정상화’에 반대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직후에 표출된 압도적인 찬성 여론에 비교하면 반대론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총리가 채택한 북일평양선언은 고이즈미 총리의 1차 방북 이후 13년이 지나는 동안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평양선언에 대한 소수의 반대론자들이 다수의 찬성론자들에 대해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역코스’의 결정적 계기는 일본에 일시 귀국한 5명의 납치 피해자들을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이러한 결정의 중심에 있었다. 아베의 리더십 하에서 일본 정부는 ‘납치 문제 해결 없이 국교정상화 없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아베는 납치 문제를 통해 일본 정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납치 문제의 해결을 국교정상화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 한 북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는 요원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선언은 북일 양국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문서이다. 아베 총리는 평양선언의 최초의 형성 과정에서부터 입회했던 정치인으로서 고이즈미 전 총리와 함께 평양선언에 책임을 지고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아도 평양선언은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동지’가 직접 서명한 가장 중요한 외교 문서이다. 한편 최근 납치 피해자 가족의 분위기가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강경론자가 후퇴하고 대화론자가 늘고 있다. 북일 양국의 관계정상화는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남겨진 마지막 과제이다. 따라서 양국 정상은 이러한 역사적 사명을 언제까지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일평양선언이 역사적 무게를 되찾을 때, 동아시아에서 평화와 번영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과정은 부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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