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근촌 백관수의 정치이념과 그것이 일제시대 및 해방정국에서 그의 행동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쓴 글이다. 백관수는 일제 35년과 군정에서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5년의 기간에 이 나라의 지도자로서 가장 굴곡된 삶을 살다간 현대사의 비극적 상징이었다. 일제치하에서 백관수는 적국의 수도에서 독립선언서의 기초에 참여하고 낭독한 기개의 인물이었다. 그의 삶에는 분명히 지사적 우국심과 고뇌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조직의 책임자가 되었을 때 백관수는 기개와 현실 사이에서 고뇌했으며 그러는 과정에 허물을 남겼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의 그의 생애에서 연정회(硏政會)의 가담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며, 시국강연회의 명단에 포함된 것은 그의 허물이지만 그가 전적으로 비난받고 책임질 일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백관수가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가담한 것은 변명할 수 없는 허물이 되었다. 그러나 조직(『동아일보』)을 파멸에 이르면서까지 지조를 지키는 것이 옳았는지 아니면 조직의 보존을 위해 자신이 멍에를 질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서 그가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하는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실의 과오를 시인·사과하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씻김굿을 통하여 용서의 길을 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동경 2·8독립선언의 주역이 친일 논쟁에 휘말리고 애국지사의 반열에서 제외되는 것은 당사자와 국민 모두에게 비극적인 사실이다. 군정기간에 그가 입법의원 임시의장의 자격으로 남한 단독정부의 결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분단의 책임 문제로 확대되어 이 사회를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 잣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1948년의 상황에서 단정 문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으며, 백관수 한 개인의 결심으로 어찌 되거나 바뀔 상황이 아니었다. 백관수를 비롯한 남한 정치 요인들의 납북은 이미 북한의 개전 당시에 입안된 용의주도한 계산에 따라 진행된 것이었다. 북한 지휘부는 서울을 점령하고 그들을 볼모로 삼아 남한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오판한 데에서 전쟁의 비극은 잉태되었다. 분단 7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에서 본다면 역사는 크게 바뀐 것이 없다. 그 당시 건국준비위원회(建準)이나 민주주의민족전선(民戰)의 노선이나 투쟁 방식과 한민당의 노선이나 지지 기반은 지금에 와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역사에서 7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역사는 진보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회의를 느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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