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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한하운 시집 사건’(1953)의 의미와 이병철

Lee Byung-Chul and the Meaning of the Case of Han Ha-Woon’s Anthology(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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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정우택
소속 및 직함 성균관대학교
발행기관 상허학회
학술지 상허학보
권호사항 40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147-184
발행 시기 2025년
키워드 #한하운   #이병철   #『한하운시초』   #한하운 시집 사건   #전위시인   #문둥이   #문화빨치산   #반공 냉전 프레임   #국가보안법   #문단재편성   #휴전   #정우택
조회수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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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1953년 6월 30일 『한하운(韓何雲詩抄)』 재판이 출간되자, 「민족적 미움을 주자―적기가(赤旗歌) 『한하운시초』와 그 배후자」(이정선)라는 글이 발표되었다. 이 글은 시집 『한하운시초』가 공산주의 선전 선동의 기제이고, 작가 한하운은 아바타에 불과하고 이병철이 배후 조종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기사가 여론을 증폭시켜 치안국, 검찰청, 국회까지 개입하게 되고, 이 사건은 휴전 직후 남한 문학장에 반공 냉전 프레임을 조성하고 문단이 재편성되는 사태를 초래했다. 본고는 『한하운시초』 초판(1949년 5월 발행)을 편집하고 발행을 주선한 시인 이병철을 중심에 놓고 ‘한하운 시집 사건’을 추적해 보았다. 해방기 전위시인 이병철은, 1948년 8월 남한단독정부 수립과 그해 12월 국가보안법 공포 이후 법의 바깥에서 지하활동을 전개하며 사회적 타자로 내몰리고 마침내 수배를 받게 되었다. ‘전위시인’ 이병철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을 발견하고, 문둥이와 빨갱이의 공통의 운명을 통해 자기를 재발견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한국전쟁 때 이병철은 월북하였다. 휴전(1953년 7월 27일) 직전에 『한하운시초』 재판이 출간되자, 남한에서는 이병철이 ‘문화빨치산’으로 침투했다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에 문단은 공포에 떨고 분열하고 상호 고발하고 증오하는 데까지 나갔다. 이 사건은 남한의 문학장이 반공주의로 재편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