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북한 정보 아카이브>
Total  0

통일과나눔 아카이브 8000만

전체메뉴

학술논문

安敬根이 걸어 간 한국근현대사 -독립운동에서 통일운동으로-

The way of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history walked by Ahn Kyung-guen -from independent movement to unification movement-

상세내역
저자 한상도
소속 및 직함 건국대학교
발행기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권호사항 (78)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41-84
발행 시기 2025년
키워드 #안경근   #김구   #운남강무학교   #황포군관학교   #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   #남북협상   #민주구국동지회   #경상북도민족통일연맹   #한상도
조회수 13
원문보기
상세내역
초록
安敬根은 23살 때인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으로 망명하여, 1921년 봄 上海로 이동하여 이듬해 4월 雲南講武學校에 입교하였다. 1924년 상해로 귀환하였으나, 다시 만주로 가서 正義府 활동에 참가하였다. 1926년 11월에서 1927년 8월까지 黃埔軍官學校에서 5기생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중국정세의 변화에 맞닥뜨려 교관 직을 사임하고 상해로 귀환하였다. 괄목할만한 군사활동 이력의 소유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1932년 4월 虹口義擧를 계기로 성립된 한ㆍ중 연대를 배경으로, 그와 金九의 인연도 본격화되었다. 그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洛陽分校 내 韓人特別班과 韓國特務隊獨立軍­學生訓練所로 짜여진 김구 항일특무조직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김구의 신변경호뿐만 아니라, 天津·上海 등지를 무대로 항일특무활동을 수행하였다. 김구의 모친과 아들도 그를 통해서야 김구와 만날 수 있었던 사실은 그의 역할과 비중을 알려준다. 1936년 11월 10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황해도 의원’에 선임되었고, 1937년 7월 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軍事委員會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46년 5월경 귀국하여, 1948년 4월 이른바 ‘남북협상’에 즈음하여 그의 존재감이 다시 부각되었다. 북한정권의 최고실력자인 김두봉 및 최용건과의 독립운동시기 인연을 배경으로, 4월 7일 김구의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파견되어, 이튿날 저녁 김일성ㆍ김두봉을 만나고, 10일 서울로 돌아왔다. 이를 토대로 4월 19일 김구가 북행길에 올랐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되고 이듬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1ㆍ4후퇴’ 때 대구로 피난 가서 23년간 살았다. 1960년 4ㆍ19 혁명 직후 民主救國同志會 결성을 주도했고, 10월 22일 慶尙北道時局對策委員會로 개편하였는데, 그가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慶尙北道民族統一聯盟 위원장으로 경북ㆍ대구지역의 통일운동을 주도하였다. 어느새 반독재·통일운동의 중심인물로 변모해 있었던 것이다. 5ㆍ16쿠테타로 체포되어, ‘북한괴뢰집단의 활동을 고무ㆍ동조하는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복역 중, 1963년 12월 16일 석방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으로, 김구의 그림자로 살아온 삶의 궤적은 항일독립운동에서 통일운동으로 이어지는 한국근현대사의 속살을 잘 드러냈다고 할 것이다.
목차
이전글, 다음글
다음글 한국전쟁과 사형제도
이전글 <광장>의 낙원회귀 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