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기에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하였다. 희생자들은 재판없이 처형당하였으며 유족들은 희생자들이 언제 어디에서 처형당하였는지도 알 수 없었고 그 주검을 수습하지도 못하였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이승만 독재의 한 부분으로서 민간인학살이 먼저 국회에서 쟁점화되었으며 이에 힘입어 경상남북도를 사례로 해서 피학살자유족회가 결성되어 피학살자를 기억하는 유족운동을 전개하였지만 5·16 군사쿠데타 정권에 의해서 탄압을 당하였다. 유족운동에 참가한 유족들은 유족회사건으로 혁명재판에 회부되었다. 혁명재판에서의 검사의 공소 사실, 재판부의 판결, 검사와 피고인의 상소 이유 등을 살펴보면 재판의 쟁점이 피학살자가 ‘국민’인가 ‘비국민’인가 하는 데 놓여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유족회와 유족회 활동이 반국가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 연장선 상에 놓여 있었다. 판결문은 “북한괴뢰의 동조자였던 보련원 및 국가보안법 기 미결수의 피살은 불법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충실한 국민이라고 할 수 없을진대…”라고 하였다. 이는 피학살자는 단지 비국민이라는 이유로 학살을 당하고도 학살자에게 죄를 물을 수도 없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해서도 안 되는 ‘호모 사케르’였음을 말한다. 국민과 비국민의 경계는 유동적이었다. 예컨대 유족회사건에서 유일하게 사형을 선고받은 유족의 피학살자 아내는 보련원도 국가보안법 기미결수도 아니었다. 이와 같이 유족회사건에 대한 재판 기록은 피학살자들이 비국민, 곧 ‘호모 사케르’였을 뿐 아니라 ‘호모 사케르’를 창출하는 ‘예외 상황’이 여전히 ‘예외’가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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