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은 북간도에서 성장하면서 민족주의사상과 기독교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진보적 신학자였던 스승 김재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1955년 이후부터 한신대와 연세대에서 구약학 강의를 하였고 특히 예레미야, 아모스 등 예언자들의 예언운동에 대해 깊이 천착하게 되었다. 목회자로서 활동하던 문익환은 1968년 성서공동번역 책임을 맡으면서 구교와 신교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경험하며, 성서번역을 통해 신학적 사상의 지경을 넓혀나갔다. 문익환이 인권을 비롯한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70년대 초 전태일의 분신자살, 김상진의 자살 등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성서공동번역 작업 중이어서 사회참여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1972년에 이르러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그 해 10월 그는 “한국 신학은 이제는 남북통일의 신학이 하루속히 모색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화해의 세력으로서 한국교회가 제 역할을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문익환은 1975년 장준하의 죽음을 계기로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하게 되는데, 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시작된 문익환의 첫 번째 수감생활에서는 사도바울을 통해 신앙의 본질은 ‘기쁨’임을 깨달았다. 그는 첫 번째 감옥시기에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고난받는 민중과 이 민족을 위해 예언자 예레미야처럼 정의와 사랑의 실천적인 삶을 살고자하였다. 1978년 10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두 번째 수감생활에서는 감옥생활을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었고, 민중 속에서 민중과 함께 살아간 예수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결국 그는 첫 번째 감옥에서는 ‘기쁨’의 신학을 깨달았다면 두 번째 감옥에서는 죄수들의 기쁨이 없는 얼굴 속에서 오히려 죄스러움을 느끼면서 신앙과 삶의 본질은 개인의 슬픔, 민족의 비애와 같은 ‘슬픔’임을 경험하게 되었다. 세 번째 감옥에서는 슬픔과 기쁨은 하나이며, 특히 그는 1980년 5월부터 1982년 12월까지 세 번째 감옥생활에서 민주화도 통일도 민족화해이자 평화운동이며, 기독교의 복음 또한 평화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익환은 이때의 민족화해는 “민족의 비극 앞에서 가슴을 치며 다 같이 슬퍼하는 일에서 이룩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를 예수의 십자가를 보고 깨달았음을 강조하였다. 1980년대 중반에는 민통련 의장으로서 문익환이 ‘민주통일병행론’의 입장에서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는 민통련 결성시기부터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통한 민주정부 수립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1986년 5.3 인천사태와 ‘이동수의 죽음’을 기화로 1987년 7월 출옥 이후 통일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즉 6월항쟁을 통해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자평하고, 지역순회 강연과 민통련의 통일위원회의 활동 등을 통해 통일운동의 지평을 확장시켜 나갔다. 19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88선언’은 민간통일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였고, 통일은 관뿐만 아니라 민이 주도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던 문익환은 1989년 3월 25일 방북을 결행하였으며, 그의 방북은 김일성과 수차례 회담 끝에 역사적인 4.2공동성명을 도출해 내 통일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문익환은 방북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분단에 안주해 온 과거를 참회하면서, 그리스도적 사랑으로 ‘모든 이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요한복음 17장 21절)구절을 남북의 통일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소명(calling)으로 받아들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였다. 1990년대에 이르러 문익환은 화해신학을 평화에 이르는 과정신학이자 실천신학으로 보면서 통일신학이 화해신학으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화해라는 민주적인 과정을 거쳐 다다른 통일은 우리의 평화일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 나아가서 세계평화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보았다. 문익환이 감옥 안에서 발견하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깨달은 화해와 평화의 정신은 곧 ‘생명사랑의 마음’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문익환의 생명사랑은 자연, 인간의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서 무엇보다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문익환이 스승 김재준의 영향으로 견지하게 된 그의 예언자적 참여신학은 1980년대 초중반부터 ‘민중성’을 띄게 되며, 1990년대의 그가 쓴『히브리민중사』를 통해 민중적 예언자적 역사참여 정신으로 발전해 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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