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대다수의 인간을 바꾼다. 바꾸면서 인간의 실존을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황폐화시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일련의 일들은 인간을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끈다는 정치이념들이 충돌한 결과이다. ‘전쟁이란 다른 수단에 의해 지속되는 정치’라는 말을 염두에 둔다면, 6.25는 냉전시대를 대표하는 전쟁이었고 남과 북의 민중들은 정치의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현장을 경험한 셈이다. ‘전쟁의 기억’은 전쟁을 경험한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겠지만, ‘기억의 전쟁’은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도 공유할 수 있다. 전쟁의 기억은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들의 기억이고, 기억의 전쟁은 전쟁과 관련되어 전해지거나 구조화된 담론을 뜻한다. ‘전쟁의 기억’과 ‘기억의 전쟁’은 그러므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전쟁과 관련된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전쟁의 기억’은 전쟁을 체험한 사람들의 스토리텔링에 기반을 이루지만 그런 스토리텔링들이 모여 ‘기억의 전쟁’을 형성하게 되고, 이 ‘기억의 전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의 기억’보다 더 굳건한 전쟁 담론을 구성하게 된다. 나아가 수십 년 전 전쟁을 실제로 경험했던 실존 인물들마저도 ‘전쟁의 기억’이 아닌 ‘기억의 전쟁’으로 자신의 경험을 머릿속에 구조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쟁 당시의 경험은 현재의 입장이나 정세로부터 꾸준히 간섭받게 되고, 자신의 ‘전쟁 기억’은 점점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공공의 전쟁담론인 ‘기억의 전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기억은 언제나 현재의 정치・사회・문화적 이해관계와 공동체적 가치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그 해석의 효용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며, 기억은 사회적 맥락과 관계없이 혼자서 과거의 실상을 해석하거나 인식하는 장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공동’ 소유의 기억과 해석이 얼마나 긍정적이고 정당한가하는 것은 항상 문제였다. 그렇다고 기억의 전쟁이 전쟁의 실상을 왜곡하는가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전쟁과 관련된 담론에서 항상 우위를 점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개별자들의 기억(‘전쟁의 기억’)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처럼 규정된 공동의 기억(‘기억의 전쟁’)이라는 데 있다. 개인의 체험은 개인의 기억으로 저장되고, 이런 개인의 기억은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생산한다. 개인의 이야기들이 모인 복수의 이야기들은 또 다른 복수의 기억으로 저장되고 이런 복수의 기억들은 차츰 시대와 정세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강렬한 사회・문화적인 검열을 거쳐 점점 사회적으로 고착된 어떤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런 기억의 경향성은 개인의 체험과 개인의 기억 사이에 침투해 양자를 갈라놓는다. 내가 체험한 대로 나에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체험했지만 기억의 경향성이 인도하는 대로 기억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겪었고 그래서 우리의 미래 역사에 중대한 시사점을 지닌 어떤 사건의 전말이 이로 인해 가려지고 왜곡되는 현상을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개별자들의 ‘전쟁의 기억’을 되살려 구술을 통해 자신의 전쟁 이야기를 하면서,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담론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들 ‘전쟁의 기억’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억의 전쟁’이 지속적으로 복원되는 현실의 대척점에서 위치하면서 전쟁담론이 치유의 담론으로 나아가는 작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의 전쟁’이 아닌 ‘전쟁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전쟁 체험담은 그런 문제제기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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