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과 그의 첫 시집『한하운시초』(1949)는 본격적 비평의 대상이 되어오지 못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문둥이시인이라는 데 말미암거니와, 더구나 그를 발굴한 이병철은 한국전쟁의 와중에 월북했다.『한하운시초』초판(1949)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한하운은 이병철의 부재로 전후 남한의 시적 고아로 남겨지게 된 것이다. 이 시집을 낸 정음사는초판의 좌익적 체취를 걷어낸 재판(1953)을 출판함으로써 한하운을 구하려고 시도했지만, 전후 남한의 경직된 반공분위기 속에서 한하운은 졸지에 좌익으로 공격받고, 시집 또한 좌경으로 매도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필화를 거쳐 오히려 한하운이 남한사회에 연착륙하게되면서, 시인 한하운은 사라지는 역설이 실현된다. 제2시집『보리피리』(1955)는 그 단적인표현이다. 이 힘겨운 생존과정 때문에 한하운과 그의 시는 명성에 반비례하여 일종의 풍문으로 떠돌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어둠에 묻힌『보리피리』이전 한하운 전기를 점검하는 한편, 그의 시의 백미라 할『한하운시초』초판(1949)에 대한 원전비판을 수행할 것이다. 요컨대 한하운은 좌익/ 우익 바깥의 하위자다. 그의 시는 하위자 최초의 시적 발화로서 한국현대시사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한하운시초』초판은 고은, 신경림, 김지하, 박노해 등, 1970년대 이후 한국민족문학/ 민중문학에 직간접적으로 연계됨으로써 더욱 종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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