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일제강점기 최익한이 연재한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통해 다산연구에 대한 성과와 한계를 평가하였다. 사회주의운동가였던 최익한이 1930년대 이후 신문글에 참여한 것은 이 시기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활동의 장이면서 생활의 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시행되었던 『여유당전서』 간행을 즈음하여 최익한은 안재홍, 정인보와 함께 다산연구에 참여하였다. 곧 1938년 12월에서 1939년 6월까지 『동아일보』에 「여유당전서를 독함」이라는 글을 장기 연재하였다. 이는 다산 저작에 대해 거의 처음으로 전반적인 평가를 한 글이었다. 이를 통해 다산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계점을 분명하게 짚기도 하였다. 또한 다산과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반계, 성호에 대해 ‘실학’이라고 일컬었으나 ‘실학파’의 명명에 대해서는 신중하였다. 이런 점에서 최익한은 실학연구에 대한 단서를 열었지만 그를 실학연구자라고 일컫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편 최익한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의 사회적 처지는 어떠했으며, 이 속에서 다산의 역할은 세계사적으로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고심하였다. 당시 조선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계사적 시각을 가지려고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서학을 강조한 점도 이를통해 세계사적 시각, 보편적 기준을 찾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조선사회의 내부적인 변화 발전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이는 당대의 학문적 수준의 일천함, 근대와 해방의 출구를 세계사적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황과 식민지 지식인의 한계가 드러난다. 반면 1955년 북한에서 작성한 『실학파와 정다산』은 연구성과의 축적과 한편으로는 북한이라는 사회 속에서 실학이 가지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민족적, 국가적 처지를 강조해야만 하였다. 그런 점에서 「여유당전서를 독함」이라는 글은 비록 신문글이라는 한계 속에서 작성하였지만 처음으로 다산에 대한 체계적인 작업을 한 것이고 최익한이 다산을 통해 극복하려는 당시 현실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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