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가람 이병기의 조선어 인식과 조선어문학의 구상을 위한 노력을 소설가 이태준과의 관련성 속에서 살펴보고자 했다. 이태준의 월북으로 가려진 두 사람의 교유를 재구성해보면, 1924년 휘문고보에서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나 1929년 이태준이 『학생』지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이병기가 이 잡지에 글을 실으며 편집에도 관여하는 흔적을 볼 수 있다. 『문장』지 주간으로 활약하게 된 토대가 있었다. 가람의 시조론은 기존 연구사가 밝히고 있듯이 후스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으며 후스의 영향은 이태준의 『문장강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실감실정론에 근거하여 후스가 말한 바 '국어의 문학'을 조선에서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가람은 1924년 신미사학을 샀는데, 이는 가람의 조선어 교육뿐만 아니라 시조론에도 영향을 끼쳤다. 시조에 사용된 수사법을 「시조와 그 연구」에서 설명하고 있거니와, 이는 이태준이 『문장강화』에서 간결체와 만연체, 강건체와 우유체, 건조체와 화려체 설명과 함께 현재 국어교육에서 사문화된 상태로 이어지고 있다. 가람과 이태준의 노력은 조선어문학, 조선어글쓰기 체제 구축을 위해 서구와 일본, 중국의 것을 나름대로 전유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노력은 국학운동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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