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한국사 연구는 대체로 해방 정국에서 좌익이 우세하였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런 인식은 해방 직후 서울에서 중도좌파인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건국위원회가 한국 사회를 이끌어갔다는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해방 직후 만들어진 건국준비위원회를 전국적으로 조망하면 이같은 결론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특히 북한을 대표하는 도시 평양에서 조직된 평남 건국준비위원회와 그것을 이끌었던 기독교계 민주주의자 조만식에 대한 연구는 해방 직후 한국의 전체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평양의 기독교계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의 창설과정, 조직, 활동, 그리고 해산과정을 살펴보았다. 비록 조만식이 서울의 여운형과 같이 건국준비위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서울의 여운형과는 상당한 차이를 갖고 있다. 평남 건준은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서울의 건준과는 달리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일시적으로 치안을 유지하는 일을 주(主) 사명으로 하였다. 평양 건준의 구성원들은 대체로 대부분 정치적으로는 우익계 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었고, 일제강점기 항일경력도 있으면서, 사회적으로는 책임 있는 시민생활을 감당하는 사업가들이었다. 일본이 정권을 인수해 주지 않았고, 또한 소련군이 건준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인민위원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평양 건준이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조만식 주도의 해방 10일은 “해방황금시대”라고 불릴 만큼 평화로운 기간이었다. 이상의 논의는 결국 소련군의 개입이야말로 해방 직후 한반도 서북 지방이 좌익으로 흐르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 형성된 인민위원회가 북한 주민의 자발적인 단체였다는 자파들의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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