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상황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고문자와 피고문자 간 힘의 절대적 불균형성이다. 대타자 앞에 선 주체가 ‘돈이냐, 목숨이냐’라는 강제된 선택에 직면하듯이 고문자 앞에 선 피고문자 역시 ‘고문 이냐, 자백이냐’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고문 과정은 대타자의 은유적 대체와 상징적 질서의 변화, 그 결과로서 주체의 재정립이 일어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고문자들은 “우리가 간첩이라고 하면 간첩이지”라는 ‘주인담론’을 제시하며, 피고문자를 간첩이라는 주인기표로 대체한다. 그 다음으로 일종의 ‘대학담론’이 뒤따르는데, 고문자는 피고문자에게 그렇다면 어떻게 북한에 갔다 왔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증거를 제시하라고 강요한다. 고문에 의해 조작된 진술은 늘 빈틈이 있기 때문에 고문자는 피고문자의 적극적 협력을 필요로 한다. 이 과정은 피고문자의 상징적 전이, 즉 피고문자가 고문자를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 상정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고문자들은 자신의 각본에 따라 사건을 조작하지만, 그 과정에서 고문자들 스스로도 이 각본을 진실로 믿게 된다. 그러나 “기도하라 그러면 믿게 될 것이다”라는 파스칼의 언명처럼 내적 믿음은 사후에 발생할 뿐이다. 고문 공간 속에서는 그 안에서 자동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고문 기계가 있고, 고문자는 고문 기계에 붙어서서 자신의 내적 믿음과 무관하게 고문과 조작을 자연스럽게 실천한다. 과거 범죄사건 수사에서 간첩 조작은 모든 조작이 최후의 난관에 부딪힐 때 등장하는 전가의 보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간첩’은 유태인과 같이 초능력을 갖는 존재, 그 수가 적어질수록 더욱 큰 힘을 갖는 역설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치즘에서 유태인의 형상이 그러하듯 간첩은 우리 한국 사회의 적대, 상징화될 수 없는 실재적 잉여를 긍정하면서 부인하는 기능을 한다. 고문 공간에서 어떤 것이 진실인 것으로 결정되는가에 대해서는 <소송>의 판사들처럼 카프카식의 외설성이 개입한다. 고문 • 조작 사건들의 경우 판사는 ‘눈 먼 대타자’라기보다는 ‘눈이 먼 척 하는’, ‘모르는 척 하는’ 대타자이다. 한국 현대사의 경험, 좌우 대립의 역사 속에서 누가 승리하는가에 의해 권력이 진실을 결정하는 처절한 역사적 경험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다. 고문 피해자가 상실된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과 유사한 거울이미지가 필요하며, 그것에 대해 상징적 현실, 대타자로부터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김근태와 김병진, 서승이 자신이 고문당한 고통스런 과정을 정밀하게 써나간 것은, 고문과 조작의 진실을 뭇 타자들로부터 인정받고 파괴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한 점이 주요한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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