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남한에서 북한연구가 제도적으로 성립되는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1960년대 월남 지식인들의 북한 재현 텍스트에 주목했다. 분석 결과 이 논문에서 밝혀낸 것은 첫째, 월남 지식인 집단이 이 시기에 이르러 분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의 와중에 월남한 일세대 월남 지식인 그룹, 1960년대 간첩 임무를 띠고 남한에 파견되었다 ‘전향’한 소위 귀순자 그룹의 분화는 중요하다. 그들은 북한연구라는 필드의 창시자(founding-father) 역할을 수행한 핵심 주체들이었고 서로 긴밀한 협업 관계를 유지했다. 둘째, 지식과 권력 사이의 충돌과 긴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북한연구의 성립은 1960년대 북한의 비약적인 경제적 성과와 4·19 직후 번성했던 통일 담론에 대처하려는 남한 통치 권력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셋째, 이 시기 북한연구는 대중적인 ‘노스탤지어’의 정서를 ‘지식’, ‘과학’에 대한 요청으로 대체했다. 1960년대 북한은 그리운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아니라 남한과는 매우 이질적인 체제, 따라서 ‘연구’와 ‘지식’이 필요한 대상으로 빠르게 전환된다. 김준엽이 이끄는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는 북한연구의 거점으로 부상한다. 또한 1960년대 남한의 북한 연구는 동시대 미국의 지역연구를 모델로 삼았고, 일본은 북한에 관한 지식 성립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루트가 되었다. 넷째, 비록 소수였지만 북한연구가 제도화되는 과정에 기여한 주류 담론과 미묘한 긴장 관계를 이루는 예외적 담론들이 존재했다. 주로 문학적 재현을 전담으로 하는 소수의 이북 출신 문인들은 남과 북 어디에도 환원되지 않는 경계인의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