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휴전에서 1956년 ‘8월 종파사건’에 이르는 시점은 북한권력 역사상 최대의 정치적 변동을 겪었던 시기로 평가된다. 본 연구는 북한체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소련의 역할을 주목하고, 이 역할을 북한 현지에서 수행한 소련대사들의 활동을 살펴보았다. 1953년 4월부터 1956년 6월까지 소련대사는 김일성을 비교적 자주 만나 면담을 하는 유일한 외국 대사였으며, 소련공민 출신 인사와의 면담을 통해 북한 내정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북한지도부와 정책을 조율하는 것이 소련대사의 주요 활동이었다. 휴전 이후 소련의 경제원조는 북한의 경제 복구에 절대적인 영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대사는 구체적인 경제문제에 개입하며 북한지도부에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김일성정권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소련을 존중하는 정책을 결정하였지만, 그들이 목표하는 경제정책을 관철하였다. 소련대사는 크고 작은 국제적 외교문제와 남북관계에 관련된 정책에 대한 소련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김일성정권은 소련의 입장을 수용하였지만, 흐루시초프의 등장이후 소련의 국제관계에 대한 노선 변화는 김일성정권과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고, 김일성의 대외관계에 대한 자율성을 자극하였다. 허가이의 자살문제나 박헌영 재판문제가 제기된 시점에 소련대사는 북한 내정에 대해 정보 수집차원 이상의 활동을 하지 않았고, 김일성은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흐루시초프 등장이후 소련대사와 김일성과의 관계는 부분적으로 소원한 관계가 되었고,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대회 전후에는 갈등이 내연되었다. 소련대사는 박헌형 처형문제에 대해 반대하고, 소련공산당 20차대회 결정이 북한에도 반영될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도 김일성은 유연하게 대응하며 독자적 권력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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