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들의 월북이 대체로 이념과는 무관한 어떤 사정으로 기억되어야 했던 것은, 당대 스타급 배우들을 포함한 대규모의 정치적 이동을 어떤 식으로든 설명해야 했던 당혹감의 소산이었다. 사회주의자임이 당연시되었던 몇몇 연극인들을 제외하면, 월북연극인의 대부분이 대중연극에서 성장한 배우들이었고 그들의 ‘돌연한 변신’은 좀처럼 이해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극단(極端)은 ‘신파’와 ‘빨갱이’를 등가화하고, 여기에 ‘친일’의 과거를 소환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전 연극인의 9할을 상회하는 좌파의 기류는 이유 있는 결과였다. 조선연극의 정치경제학적 조건은 여전히 ‘해방’이 되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었던 까닭에, 연극전선의 통일을 기하고자 했던 좌파조직운동에 힘입어 민족연극의 건설이라는 명분에 동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대 혹은 공동체적 감각은 바로 일제 말 전시통제가 빚어낸 뜻밖의 결과였다. 무엇보다도 이는 그 이전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좌파이력의 제작진과 대중극단 배우의 결합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조우는 동원정치의 시대에 서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주는 공동체이자, 해방 이후에는 좌파의 기류를 형성해간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남한의 형세는 연극인들의 월북을 재촉하고 있었다. 미군정하에서 비롯된 정치과정들은 연극인들을 북쪽으로 밀어내는 경제적 결과를 초래했고, 그들은 선택을 해야 했다. 이들의 월북은 좌파의 신원이 사회주의자로 등재되는 정치적 선택이었다. 단정이후 전향에서 월북으로의 역전(逆轉)은 그 극적인 순간을 보여주는 냉전의 드라마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들의 월북은 곧 냉전의 표상체계가 연극에 응축되어갈 미래였다는 점에서 조선연극의 냉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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