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릉은 북한에 있는 제릉과 후릉을 포함해 모두 42릉, 2묘(연산군, 광해군)로 정치, 경제, 풍수, 문화적 여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이 중 추존왕릉을 제외하고 천릉을 한 왕릉은 세종, 선조, 인조, 효종, 정조, 순조의 여섯 임금이 해당된다. 그러나 이 중 왕의 구릉지인 초장지를 확인한 임금은 정조가 유일하다. 세종의 英陵과 효종의 寧陵에 후대의 왕인 순조의 仁陵과 영조 元陵의 능역이 조성된 것처럼 구릉 역시도 왕릉과 동일하게 관리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왕의 초장지를 확인하기 어려운 이유는 조선 초기 세종과 장경왕후의 예에서 볼 때 구석물을 인근의 屛處에 묻어 두었고, 중기 이후에는 석물의 재사용을 해 왔기 때문에 그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인조 長陵의 경우는 인렬왕후가 1635년 먼저 승하하자 왕의 壽陵地로 그 옆을 정했다가 인조가 1649년 승하한 후 쌍릉으로 조영된 왕릉이다. 仁祖長陵山陵都監儀軌는 당시의 능역조성과정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전한다. 그러나 영조 7년 천릉시 대부분의 석물을 파주 운천리에서 파주 교하읍치(現 갈현리)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그간 파주 운천리에는 왕의 석물은 물론 그 능역조차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仁祖長陵遷陵都監儀軌는 쌍릉에서 합장릉으로 능제가 변화되면서 척수가 맞지 않아 남겨진 것은 물론 이전된 석물과 목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 2014년 1월 초 파주 운천리 일대의 지표를 조사한 결과. 운천리에서 왕릉의 정지대석에 이어진 병풍석 부재, 와첨상석, 장대석, 초석 등을 발견하여 관계당국에 조사 및 보존조치를 의뢰한 바 있다.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석물의 일부는 지표에 노출되어 있지만 천릉도감에는 능역의 남변과 북변에 상당량을 매안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현재 왕릉의 초장지는 2011년 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정조의 건릉을 발굴, 확인한 바 있지만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왕릉은 아직 확인한 바가 없다. 더욱이 능역이 조성된 지 95년이 지난 후 왕과 왕비릉이 쌍릉에서 합장릉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밝힐 수 있는 점에서 인조 구장릉의 발견은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현재 인조 초장지에는 의인군 묘가 1968년 이장되어 있는 상태다. 다행히 이장할 때 묘가 좌측으로 비켜났고 매장의 깊이를 고려할 때 왕과 왕비의 매장시설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어 추후 발굴, 보존 시 의인군의 종중과 긴밀한 협의가 요구된다. 따라서 인조의 초장지 발견의 의미는 첫째 조선 중기 현궁의 조성방식과 石物, 蓮池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둘째 사료와의 비교를 통해 조선 중기 산릉제도 및 부장품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재 비공개릉인 長陵이 추후 개방될 때 운천리의 초장지와 연계한다면 또 하나의 朝鮮王陵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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