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령산성은 1708년 수축되었다. 산성 운영의 규칙인 절목은 1749년에 경상도에서 초안이 마련되어 1751년 12월에 비변사의 검토가 완료되고, 왕에게 보고되어 확정되었다. 이후 1752년부터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까지 절목 규정에 의해 산성이 운영되었다. 조령산성은 큰 교통로를 직접 차단한 관성(關城)이란 점에서 다른 산성들과 구분되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개를 넘기 위해 계곡 입구의 첫 관문을 통과하여 협곡을 이룬 좁은 계곡에 자리한 2관문을 통과하여 3관문인 조령관을 지나는 길을 차단한 관성(關城)인 동시에, 이 길의 동쪽 높은 위치에 예로부터 입보(入保)하기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내외 2중의 산성을 형성하였다. 경상북도 북부의 낙동강 발원지 부군 고을들의 세금이 이 고개를 통해 북쪽으로 고개를 넘어 한강 유역의 큰 도시인 충주에 이르러 창고에 보관되었다가 도성(都城)으로 운반되었으므로, 세곡운반 루트의 길목을 지키는 교통로를 지키는 곳이었다. 이러한 산성의 구조는 내외 이중의 성벽을 가진 산성의 구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령산성이 자리한 고을인 문경현은 성 밖의 관아에 수령이 있고, 항시 산성에 머무르는 별장에게 평상시 산성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들 두 관리는 산성을 지키는 연습과 실제 산성에서 방어하는 경우 각각 수성장과 수성중군이 되어 휘하 관속과 군병 및 주민들을 통할하도록 절목에 규정되었다. 조령산성을 방어하는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산성작대군’을 조직하도록 규정된 절목의 규정은 이미 지방군으로 조직된 속오군을 주축으로 하였다. 115명 전후로 구성된 초(哨)를 단위로 하는 병력이 주축이 되었고 7초의 병력이었다가, 후에는 이웃고을인 함창의 속오군도 합쳐 관리토록 되었다. 이 밖에 성내에 거주하는 300호 이상의 주민들로 거주민 위주의 지역 군대조직을 하도록 하고, 또 성안에 있는 사찰의 승려들로 약 50명 규모의 승군을 조직하여 개별적 사격기술 연습과 봄과 가을에 모여서 합동 군사연습을 하도록 조목이 마련되었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여 신분제에 기초하여 군역(軍役)을 경제적 부담으로 대신하는 수첩군관은 300명에서 550명까지 확충되도록 규정하였고, 이들에게도 형식상 사격기술을 습득하고, 합동 연습에 참가토록 규정되었다. 성벽의 수축은 대규모 수축의 경우는 산성창고의 조적(糶糴)을 통한 이자로 받은 곡식과, 군사들이 군역 복무 대신 내는 신역 세로서의 포목, 승군의 동원 등으로 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각종 기록에 조령산성 관련 조적의 관할 기관은 중앙 관청, 지방 감영(監營)과 산성에 소속된 군향속읍 5개 고을에서 마련하는 것으로 구분되어 시기에 따라 그 규모가 쌀과 콩 등의 전통적인 부피단위로 수량이 기록되어 나타난다. 조령산성에는 긴급한 때에 사용할 군량 약 1만석 이상을 보관하는 목표가 세워졌다. 이 군량을 확보하는 주요 수단은 산성 군향을 조적하여 그 이자를 축적하는 방법이었다. 이를 위한 주요 재원을 담당하고 조적(糶糴)과 개색(改色)을 하는 5개 속읍은 각기 성내에 산성창고를 두고 군향을 보관, 조적하였다. 산성의 운영에 참여토록 규정된 5개 고을은 당초부터 상주진의 소속도 있으나, 보다 동북쪽의 안동진관 소속이 두 고을이나 배속되었다. 이처럼 하나의 산성에 하나의 진관 소속 군사와 군향이 배속되지 않고 복수의 진관 소속으로 된 곳이란 특성도 조령산성이 가진 성격의 특이한 점이었다. 조령산성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천연조건으로 이미 다른 규정에 의해 소나무 보존구역으로 설정된 곳이었으므로, 이에 대한 관리와 감독을 조령 별장이 하도록 규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산성들에서 이처럼 성이 자리한 산이 황장목 보호지역으로 된 곳은 이곳 조령산성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조령산성은 수축이 논의될 때 산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대포와 총 및 탄환이 제작되었다. 대략 큰 대포 250문 이상 각종 총포가 제작되었으나, 동시에 진행된 서울 도성 배후의 북한산성이 수축되어 그곳의 방어에 필요한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옮겨졌다. 이후 산성을 지키기 위한 각종의 깃발과 신호용 악기, 취사와 야영에 필요한 도구, 통신시설의 유지와 신호에 필요한 각종 장비 등의 군사장비는 착실히 마련되어, 1894년에 기록된 매우 자세한 목록이 남아있다. 이들을 통해 다른 산성들과 달리 조령산성은 전통적인 군사제도가 유지되는 마지막단계까지 지속적으로 그 전략적 중요성이 인식되어 군사력의 확충이 이루어졌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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