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반도에서 처음 종이를 접한 것은 서북한 지역의 낙랑군이었다. 낙랑군 지역에서도 기원전 1세기 후반~2세기 후반에 각종 인장, 붓과 벼루, 연적, 칠권통, 삭도 등의 서사 도구와 목간이 출토되어 여전히 목간이 주로 사용되었다. 2세기 말 이후 종이 또는 비단 두루마리 문서의 사용을 알려주는 칠권통이 출토되고, 낙랑토성 내부에 제지소가 설치되는 등 낙랑군에서의 종이 제작과 사용은 일대 전환을 맞았다. 일제강점기 낙랑토성 발굴 구역에는 기존에 존재하던 청동기와 철기 제작 공방을 철거하고 새로 제지소가 설치되었다. 제지소의 입지인 낮은 지대에 종이 제작에 필요한 각종 시설이 유기적으로 배치되었다. 이 시설들을 明代 『天工開物』의 제지시설 및 제지기술과 비교・검토한 결과, 이곳에 제지소가 설치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서쪽의 고지대에 깊게 판 우물은 그 동쪽 저지대의 종이 제작에 필요한 물의 공급처로, 방형 수혈유구는 종이 제작에 필요한 물의 저수조로, 입・출수구를 갖춘 대형의 전축유구는 종이 원료의 세척과 함침 수조로, 대형의 점토 소결유구는 불린 종이 원료를 삶는 煮篁施設로, 3조의 대형 멧돌은 삶은 종이 원료를 자르고 가는 叩解 기구로, 대형 건물지 내의 자갈돌 부석유구는 초지용 紙筒의 기초시설로, 고래시설과 대형 판석들은 종이 건조시설로 특정되었다. 이로써 낙랑토성에 종이 제작에 필요한 제 시설이 일관되게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낙랑군의 치소인 낙랑토성에 제지소 설치와 그에 수반하는 제지술은 한의 군현 지배 과정에서 전해진 것으로 파악된다. 낙랑군과 같은 시기에 군현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의 경우도 2세기 후반경에 중국의 종이와 제지술이 보급되어 제지 수공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한군현 중에 麻・竹・楮 등 종이 원료인 수피를 수급할 수 있는 남방 지역을 중심으로 제지소가 설치되어 군현 지배에 필요한 종이를 충당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영세한 보고문에 추측을 거듭하여 얻은 결과지만, 종전에 알지 못했던 종이 제작과 관련된 몇몇 사실들에 접근해 볼 수 있었다. 종이가 가지는 고고학적・역사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종이 유물의 발견, 제지소 또는 제지시설에 대한 고고학 발굴 조사는 다른 어떤 유적・유구보다도 중요성이 높다. 이에 본고가 야외고고학 현장에서 제지 관련 유적·유물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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