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17세기 수도권 방어체제의 재편이라는 맥락 속에서 총융청의 창설과 운영 및 위상 변화가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16세기 후반 이후 전란이 거듭되며 도성이 크게 파괴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후금・청의 위협에 대응해 유사시 도성을 포기하고 왕실과 조정을 강화도・남한산성 등 보장처로 입보시켜 항전하는 방어 전략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방어 구상에 따라 경기 전역의 군병을 총괄하여 보장처의 방어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총융청이 창설되었다. 하지만 정묘・병자호란에서 일부 지역의 병력 동원이 제한되고, 지휘 상의 혼란이 발생하며 수도방어체제 및 총융청의 운영 전반에 개선점이 확인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각 보장처와 주요 거점에 수어청, 진무영, 관리영 등 별도 군영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방어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 결과 총융청은 경기 서부 내륙 방어를 담당하는 내・외영 편제의 군영으로 재편되었다. 숙종대 후반에는 청 해적의 위협과 보장처의 실효성 논란 속에서 도성 수비 강화가 추진되었다. 중앙군영 군제의 재편 과정에서 총융청 역시 편제가 정비되었으나, 유사시 내영과 외영의 대규모 병력이 집결할 거점 마련은 여전히 과제로 남았다. 이때 북한산성이 축성되고 탕춘대가 배후기지로 정비됨에 따라, 총융청은 이를 신지(信地)로 확보해 도성과 경기 서북부 외곽 요충지를 연결하는 중추 군영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8세기 수도권 방어체제를 도성 수비 중심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기반이 되었고, 총융청은 그 전환의 핵심 매개로서 새로운 위상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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