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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5・15 서울역 회군과 5・27 결사항전 비교 연구

Comparative study of the 5.15 Seoul Station Retreat and the 5.27 Decisive B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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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오세제, 김동택
소속 및 직함 서강대학교
발행기관 현대정치연구소
학술지 현대정치연구
권호사항 18(2)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129-163
발행 시기 2025년
키워드 #5・15 서울역 회군   #5・18 광주민중항쟁   #서울대 학생운동지도부   #심리전   #윤상원   #시민군   #5・27 결사항전   #12・3 계엄령   #오세제   #김동택
조회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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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이 연구는 5・15 서울역 회군을 이끌었던 서울대 학생지도부와 5・18 항쟁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윤상원과 시민군의 5・27 결사항전에 초점을 맞춰 두 개의 사건이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과정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 역사적 함의가 무엇인지를 비교사적 방법을 통해분석한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1980년 5월 대한민국에서 신군부의 권력욕이 작동한다는 점에서동일한 역사적 정치적 조건 위에 있었다. 시간적으로 5・15 서울역 회군 직후에 5・18 광주민중항쟁이 발생한다. 하지만 두 사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5・27 전남도청에서 윤상원과 시민군은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자 결사항전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반면 5・15 서울역 회군에서학생 지도부가 공수부대가 투입된다는 공포로 인해 후퇴를 선택해, 학생운동세력이 다시 결집할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서울의 학생운동세력이 교두보를 잃었기 때문에, 신군부는 이들을 염려할필요 없이 광주에 31사단 외에도 20사단과 3개 공수여단의 병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이 상반된 선택은 이후 역사 속에서 다른 평가와 교훈을 준다. 서울역 회군은 연구는 물론이고 시민사회의 기억에서 거의 잊힌 반면, 5・18 광주민중항쟁은 지속적으로 연구, 기억, 재현되고있다. 광주 시민군은 패배했지만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1980년 5월이후 1987년 민주화 항쟁에서 미국은 전두환의 군 동원을 강력히 막았으며, 군부 역시 국내 정치에서 무력 동원은 금기시하고 있다. 더불어 2016년 말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때나 2024년 12월3일 계엄령 당시에도 시민들은 역사의 최전선에 두려움 없이 섰다. 윤상원의 5・27 결사항전은군부의 정치 개입에 대한 거부, 북풍과 같은 북한 변수의 제한,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의 제한을낳는 등 한국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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