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실은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 1962년부터 1971년까지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역임하였다. 대한적십자사(이하적십자사)의 역사에서 김신실은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으나 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제1공화국 시기 이승만 대통령의 적극적인 권유로 적십자사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적십자 활동과 함께 아시아민족반공대회에 참가하는 등 이승만의 반공외교정책과 함께 하였던 김신실의 활동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김신실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하여 이승만이 교장으로 있던 한인중앙학원에서 공부하면서부터 이승만과의 인연이깊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오하이오주 오벌린대학에서 체육학을 전공하고, 미시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는 등 미국에서의 교육 경험은 김신실이 적십자 국제활동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김신실은 제1공화국 시기 1954년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초창기부터 활동하였으며, 적십자사의 사무총장에 임명되어 제19차 뉴델리 국제적십자위원회에 참가하는 등 납북인사 문제 해결에 힘썼다. 회의 마지막 날인 11월 7일 북한측은 실향사민 7,034명 중 337명 생존자 명단을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대한적십자사 대표에게 전달하였다. 김신실이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던 50년대 중반 이승만 정부는 아시아민족반공연맹과 세계반공연맹을 주도적으로 창설하였으며, 반공의 큰흐름 안에서 일본의 반공노선에 회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반일노선으로 나타났다. 세계적인 냉전체제 속에서 아직 한국전쟁의 영향이 지대했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남북한 적십자사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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