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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1259년 북계 成州 岐巖城戰鬪 승전의 역사적 성격

Historical Characteristics of the Victory of Seongju(成州) Kiamseong(岐巖城) Battle in Bukkye(北界) Province in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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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강재광
소속 및 직함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기관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학술지 군사
권호사항 (136)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81-117
발행 시기 2025년
키워드 #성주   #기암성   #기암성전투   #동여도   #대동여지도   #대동방여   #전도   #야별초   #야별초 지유   #험산대성   #보파대   #태자친조   #대몽강화   #강재광
조회수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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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성주 기암성은 조선 후기 지도류인 『동여도』·『대동여지도』· 『대동방여전도』를 통해서 보면, 성천도호부 삼기면(지금의 북한 평안남도 성천군 삼덕면)에 있는 두미산 좌측 산자락에 위치한 석성이었고“험산대성”의 입지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기암성에서 1259년(고종 46) 1월에 대몽전투가 벌어졌는데, 야별초 부대와 성주 백성들이 서로 협력하여 몽골 장수 보파대가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몽골군 1개 부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기암성전투는 몽골 제6차 침입(1254∼1259) 말엽에고려가 북계 지역에서 거둔 마지막 승리이자 군·관·민이 협력하여 거둔유일한 승리였다. 기암성에는 이미 1258년에 야별초 부대가 파견되어있었는데, 비록 방호별감은 아니지만 방호별감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야별초 지유가 휘하 야별초 군사들(대략 200명 내외)과 성주 백성들을 총괄 지휘하여 몽골 기병대를 격퇴시켰다는 점이 특색이다. 기암성전투 승전 요인은 ①기암성이 비류강·기창후천에 둘러싸여 있고 비교적 험준한 산악지대에 위치하여 적군 방어에 유리하였다는 점, ②고려 최정예 군사집단이었던 야별초가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 ③몽골 제5차 침입 때까지도 몽골군에게 한 번도 침입을 받지 않았던성주민의 항전 역량이 1259년까지 일정하게 보전되고 있었다는 점이주효하게 작용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북계에 주둔 중인 몽골군은 북계의 여러 산성을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고, 고려와 몽골 사이에서 태자친조를 조건으로 강화 협상이 급물살을 타게 되어 결국 1259 년 4월에 대몽강화가 체결되는 데 일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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