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해방 이후 <아리랑>이 남북한 양쪽에서 체제나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는 민족의 노래로 담론적으로 구축되어, 1963년 1월 도쿄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로잔 남북체육회담에서 국가(國歌)로 결정되기까지의 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아리랑>은 식민지기에 민족의 소리인 민요로 발견되어 정전화가 진행되었지만, 잡가로서 본래 가지고 있던 통속성은 음반 산업과 결합하여 더욱더 확산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통속성에 가려져 있던 저항성은 부각되지 못했다. 그 속에서 <아리랑>이 다시 주목되기 시작한 것은 주로 주한미군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조선의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에 관심을 갖고 공식 행사에서 연주하는 한편, 54년에 반공 영화 『아리랑』을 한국과 공동 제작하면서 <아리랑>에서 점차 통속성을 떨쳐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57년에 나운규 서거 20주기를 기념하여 영화 『아리랑』 리메이크가 제작되는 흐름으로 이어져, 재차 항일 저항의 메시지가 대중적으로 선전되었다. 한편 북한의 경우는 당초부터 민족음악 건설의 기초자료로서 그 가치가 천명되어 일찍이 민요의 계승 작업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리랑>이 특별히 주목되어 공식적인 노래로 불린 것은 아니었다.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로서 특별한 가치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남한과 마찬가지로 57년에 영화 『아리랑』이 일제하 민족해방투쟁에 복무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선구적 영화로 주목된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에서 <아리랑>이 급부상하여 정전화된 것은, 아마도 당시 냉전체제의 주요 경쟁무대였던 한반도에서, <아리랑>이 한국전쟁을 거치며 미군에 의해 국제사회로 알려지거나, 남한에 의해 한미합작영화나 『아리랑』의 리메이크가 제작되는 것에 자극되어 그것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볼 때, 남북이 <아리랑>을 민족의 노래로 받아들이고 63년에는 남북단일팀 국가라는 공식성을 부여하게 된 계기는, 해방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초래된 결과라기보다는, 냉전체제의 시대적인 논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것은 냉전체제의 축소판이었던 남북이 조선적인 것의 상징으로서 <아리랑>에 공식적인 권위를 부여할 때 미국이나 소련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현재 남북이 모두 선양하는 <아리랑>의 민족적 가치가 구축된 기원에는, 냉전의 대립구도 속에서 미소에 의해 <아리랑>이 발견되고 인정되었다는 사실 내지 상상이 존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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