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철기시대 전기 요령~서북한 지역의 물질문화는 기원전 3세기 전국연문화가 요서와 요동 등지의 일부 지역에까지 확산됨에 따라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된다. 이 가운데 대동강~재령강 유역의 정백동유형 전기는 이 지역 토착의 신흥동유형이 아닌 십이대영자문화 정가와자유형을 직접적인 계보로 하여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후기의 물질문화 양상이 위만조선과 낙랑군에 대응된다는 점에서 진개 침공 이후 이 일대로 밀려난 준왕의 고조선과 준왕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은 위만조선에 의해 남겨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십이대영자문화 정가와자유형을 준왕 이전의 고조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위략』의 조선후 기사와 부합하는 것은 심양의 정가와자유형이 아닌 객좌의 남동구유형이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게 된 까닭은 십이대영자문화권이 기원전 6~4세기 각각 스스로 ‘조선’이라 표방한 객좌 중심과 심양 중심의 2개 연맹체로 재편되었고, 이러한 구조를 중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연나라는기원전 4세기 연산산지를 완전히 내지화한 후 기원전 3세기 초 동쪽에 이웃하고 있던 객좌의 고조선을 침공하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심양에도 또 다른 고조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마저 공격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사기』와 『위략』 전승에 미묘한 차이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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