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 진관동 일대에서는 신도시개발개획에 앞서 문화유적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 대규모의 분묘군이 조성되어 있었던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4,237기의 분묘가 발굴되었으며, 이와 함께 4,500여점에 달하는 유물이 출토되어 연구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간 분묘에 관한 연구는 유구를 발굴했던 발굴자들을 중심으로 고고학계에서 진행되어 왔다. 또한 묘제와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역사학계에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진관동 유적에 관한 연구는 분묘의 연대파악을 위한 사료의 적용이라는 측면과 묘제연구를 위한 유구의 분석이라는 측면에 집중되어 있던 것이 사실이다. 본 연구에서는 그간 주목되어 왔던 연대별 분묘양상의 검증이라는 측면에서 벗어나 이 지역에 이와 같은 대규모 분묘군이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과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피장자들의 신분을 살펴봄으로써 이 지역의 성격과 구체적인 피장자의 신분을 연결시켜 알아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서울시와 고양시의 경계면에 자리한 진관동 유적에 언제부터 이런 대규모 집단 묘역이 조성되었는지 문헌기록과 발굴성과를 통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당대인들이 이 지역을 어떻게 부르고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주목해 본 후, 이 지역 피장자들의 신분을 파악해 봄으로써 유교적 상장례의 실천이 어느 정도까지 이행되고 있었는지를 포괄적 의미에서 알아보고자 하였다. 조선이 추구했던 유교적 이상사회인 주대(周代)에는 모든 백성들의 분묘가 한 곳에 정해져서 공동묘역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것을 방묘(邦墓)라 불렀는데, 조선에서도 이 같은 주대의 예법을 따라 방묘를 정하여 장사하게 하였다. 조선에서 조성되었던 방묘에 관한 기록은 조선 중기에서부터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늦어도 이 시기에는 방묘라는 공동묘역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대인들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방묘가 진관동 일대에 조성되었다는 사실은 문헌기록을 통해 정확한 지리적 위치를 파악해 볼 수 있었는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는 방묘가 동교와 서교라는 지역에 형성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에서는 동교는 영서역, 지금의 의정부 부근을 포함하고 있으며, 서교는 홍제원, 지금의 홍제동 일대를 포괄하는 의미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중 서교는 진관동과 지리적으로 부합되는 면이 많았는데, 기록에서는 서교가 주로 왕이 사신을 맞이하던 곳, 혹은 종종 사냥을 하러 나가던 곳으로 설명되곤 한다. 따라서 서교라는 지역은 홍제원을 넘어선 성 서쪽 외곽지역을 이르는 말로 북한산 인근지역이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이렇게 대규모 공동묘역인 방묘가 진관동 일대에 자리하게 된 이유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곳은 성저십리를 막 벗어난 지역으로 한양과 인접한 곳에 자리하였고 예로부터 사신들의 왕례가 잦아서 도로가 잘 마련된 지역이자 박석고개와 북한산이 거주지와 경계를 이루어 생활공간과 자연스럽게 분리된다는 이점 때문에 묘역이 조성되기 적합하였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실제로 1789년대에 기록된 한성부 성 안․밖의 호구분포를 살펴보면, 이곳이 다른 성 외곽지역에 비해 유독 거주민이 적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이 지역 일대에 인가가 들어서기 어려운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진관동 일대에 집단묘역이 형성된 두 번째 이유로는 조선시대 지배이념인 유교사상을 들 수 있었다. 어느 제도보다도 보수적인 변화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는 묘제가 불교식 화장에서 유교식 매장제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것은 지배층의 강제적 시행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조선시대 묘장제도 또한 연좌제(緣坐制)를 적용할 정도로 실로 엄격하였다. 이런 강제적 시행에도 불구하고 매장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이에 따라 매장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으며 그 부작용으로 인해 유기되는 시신도 상당수에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 국가에서는 매장제를 유도함과 동시에 유기되는 시신을 처리할 수 있는 기관까지 설치하였는데, 국가에서는 이런 유기된 시신을 매장할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며 이는 한성의 인근지역이자 인가와 분리된 지역이었어야 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요건에 잘 부합되는 이곳 진관동 일대에 대형 분묘군이 자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진관동 일대에 분묘가 들어서게 된 또 하나의 이유로 진관사를 꼽았다. 진관사는 조선전기부터 수륙재를 담당했던 사찰로, 수륙재는 물과 육지를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佛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영혼천도의식 중 하나였다. 특히나 수륙재는 불교의 여러 의식 가운데서도 그 설행목적이 영혼천도에 집중되어 있고 규모 또한 가장 크기 때문에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륙재가 시행되었던 서교지역에 매장된다는 것은 사후 영혼천도에 대한 염원과 함께 서방극락정토사상이 덧붙여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에게 선호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조성되었던 방묘가 진관동 일대에 서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조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조선전기 한양의 공동묘역으로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에 서교지역에서 확인된 피장자들의 신분을 살펴봄으로써 서교지역에 조성되었던 방묘가 한양민들의 공동묘역으로써 사용되었던 것인지를 확인해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신분이 확인되는 피장자들은 모두 궁궐을 중심으로 직역한 사람들로서 통정대부 및 중추부사를 지냈던 사람들과 5품 이하의 품계를 가지고 궁궐에 직역을 했던 사람이거나 무관의 신분을 가진 인물 및 양인들과 함께 ‘학생’의 신분을 밝히고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방묘에 부장된 4,237기에 달하는 분묘에는 이들 양인을 비롯한 일반 서민에까지 모두 서교지역이라는 공동묘역을 방묘로 정하여 매장했던 성리학적 유교사상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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