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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반동의 추억: 김일성 사망과 조문정국

Memories of opposition : Kim Il‐sung's Death and Politics of the Condol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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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진환
소속 및 직함 건국대학교
발행기관 민족문화연구원
학술지 민족문화연구
권호사항 (59)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3-35
발행 시기 2025년
키워드 #남북정상회담   #김영삼   #김일성   #조문정국   #김진환
조회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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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야당 지도자 시절이던 1970~1980년대에 남북정상회담을 적극 찬성하던 김영삼은 여당 대통령 후보가 된 1992년부터 남북정상회담 신중론으로 돌아섰다. 나아가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3월에 북한이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탈퇴까지 선언하자 김영삼은 강경한 대북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러다 1994년 6월 카터 방북으로 북·미 핵공방이 큰 고비를 넘기고, 카터가 김일성의 남북정상회담 제안이라는 예상치 못한 선물까지 가져오자, 김영삼은 대북정책을 전향적으로 바꾸면서 남북정상회담 개최 준비에 매진했다. 하지만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김영삼 정부의 전향적 대북정책에 대한 대북 강경파의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남북정상회담 합의 이후 진전되던 남북관계는 빠르게 후퇴했다. 요약하면 대북 강경파는 김일성 사망 직후부터 ‘호칭’ 시비로 시작해 국회에서의 ‘조문 파동’을 거치면서 남한 국민들에게 부정일변도의 김일성관, 북한관 정립을 다시 강조하고, 나아가 김정일 체제의 불안정성을 부각시켜 김영삼과 김정일의 장래 만남을 가로막음으로써 남한 국민들이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위로부터의’ 화해를 통해 대북 적대감을 낮출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 버렸다. 김영삼은 김일성 사후 정국 초기에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남북정상회담 추진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보다는 침묵을 지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대북 강경파의 반동에 빌미를 제공했다. 비록 김영삼은 7월 하순까지도 남북정상회담 추진에 미련을 두고 있었지만 국내의 정치적 역학관계 탓에 이미 남북정상회담은 그의 손을 떠난 과제가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1994년 여름 조문정국의 최종 승자는 남한 내 언론, 정치권에 널리 퍼져 있는 ‘전통적’ 대북 강경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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