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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도유호와 한흥수: 그들의 행적과 학술 논쟁(1948~1950)

Do, Yu-ho and Han, Hung-soo: Their activities and academic debates between 1948~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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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한창균
소속 및 직함 한남대학교
발행기관 한국고고학회
학술지 한국고고학보
권호사항 (87)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76-118
발행 시기 2025년
키워드 #도유호와 한흥수   #행적   #학술 논쟁   #비엔나학파   #변증법적 발전사관   #유물사관   #한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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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도유호와 한흥수는 초기 북한 고고학계의 동향을 언급할 때 자주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유럽에서 유학하여 민속학과 선사학 등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북한에서 활동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도유호는 193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에서, 그리고 한흥수는 1940년 스위스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각각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비엔나 시절, 도유호에게 학문적으로 영향을 준 학자들은 헤르더, 그레브너, 슈미트, 코퍼스, 하이네겔 데른, 멩힌 등이다. 도유호는 헤르더의 역사철학적 인식을 토대로 변증법적 발전사관의 논리를 세웠고, 20세기 초반 비엔나학파가 주창했던 문화권설을 배경으로 민속학과 선사고고학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갔다. 이러한 지적 기반 위에서 중국 도시문화의 기원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1946년 10월 삼팔선을 넘어 월북하였다. 유럽 유학 이전, 한흥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 근거하여 조선의 원시시대 사회사를 연구하는 데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그는 비엔나학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유물사관적인 방법론에 대하여 강한 이론(異論)을 제기하였던 슈미트와 코퍼스, 그리고 1900년대 초반 스페인의 구석기 문화 연구에 기여했던 오버마이어의 지도를 받으며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1947년 6월 체코 프라하에서 김일성의 친서를 받았고, 이를 계기로 1948년경에 입북하였다. 도유호와 한흥수는 원시시대, 고고학, 민속학 등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면서 북한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원시사회의 성격, 생산관계, 혈연관계 등을 고찰하는 데 있어, 서로 상반된 주장과 접근 방법을 표명하며 여러 차례 학술 논쟁을 벌였다. 한국 고고학사의 측면에서 판단할 때, 그들의 논쟁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사회주의적 분위기가 고조된 초기 북한 고고학계의 학문적인 동향을 반영해준다고 볼 수 있다. 둘째, 그들의 논쟁과 거기에서 논의된 주제는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시간적 공간에서 이루어진 한국 고고학사의 빈틈을 채워주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