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일국사적 관점을 넘어 국제사적 시각으로 대한민국의 수립과정에서 유엔 승인 획득을 위한 건국 외교활동에 이르는 면면을 조명해 봄으로써 다음과 같은 점을 밝혔다. 첫째, 미국이 반공보루 구축을 위해 한국을 분단한 것이 아니라 소련이 중국 공산화의 후방기지로 북한을 활용하기 위해 런던외상회의가 열리고 있던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려 분단을 기정사실화 했으며, 광복 이후 6․25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미국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또한 중국의 공산화가 명약관화해진 1947년 9월 이후 미국이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통한 해결로 정책을 바꾼 것도 1946년 정읍선언 이래 이를 먼저 제기하고 요구해온 이승만의 전략을 받아들인 것임을 밝혔다. 둘째,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전문 외교관이 아닌 대표단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팽창일로를 걷고 있던 공산진영의 저지공각을 뚫고 미온적 입장을 보이고 있던 인도와 아랍진영 회원국의 지지를 이끌어 내 48대 6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유엔의 승인을 얻어낸 것은 미국과 바티칸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지만, 이들의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이들로 대표단을 구성한 이승만의 전략과 장면과 조병옥 등 단원들의 헌신적 노력 때문이었음을 밝혔다. 셋째,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과 제2차 세계대전 시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 외교의 실패, 그리고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신생 대한민국이 건국 4개월 만인 1948년 12월 12일 3차 유엔총회에서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은 것은 획기적 사건이었으며, 이러한 승인이 1950년 6ㆍ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었음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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