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의 6 · 25전쟁 당시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인천지구 학도의용군의 형성과 활동, 변화 그리고 의의를 고찰한 논문이다. 본 연구는 학도 의용군 관련 자료가 제한된 현실에 따라 일부 2차 자료와 인천학생 6 · 25참전사 편찬위원회가 발간한 구술사 기록을 주로 참고하였다. 인천지구 학도의용군은 1950년 6월 26일 편성되었는데 이는 가장 먼저 형성되었다고 알려진 비상학도대 보다 앞선 것이었다. 또한 당시 여타의 학도의용군과 달리 인천의 학도의용군들은 개전 초기 인천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들은 도시를 방어하고, 식량을 분배하였으며 주요 건물에 대한 경계를 담당하였다. 심지어 경찰이 철수한 이후에 다시 그들을 불러와서 지방 공산주의자들이 사전에 반공 우익 인사들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분쇄하기도 하였다. 북한군의 점령에 따라 잠적하였던 인천지구 학도의용군은 국제연합군의 상륙 이후 조직을 재건하였고 많은 수의 학생들을 새로이 흡수하였다. 조직이 급격히 확장되었던 배경에는 개전 초기 학도의용군들이 보여주었던 강렬한 인상과 많은 학생들이 북한 점령 치하에서 겪었던 고통에 대한 울분이 작용하였다. 이 시기부터 인천의 학도의용군들은 국방부 정훈국의 통제에 따라 치안유지 등의 활동을 실시하였다. 1950년 10월 중국군의 참전에 따라 인천지구 학도의용군은 남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학도의용군은 거의 3,000명에 달하는 인원이 남으로 장정을 시작하였는데, 이동을 위한 적절한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여정은 고난으로 가득하였다. 통영으로 이동한 이후 많은 인천 학도의용군 소속 학생들은 해병대 훈련소나 육군 제2훈련소를 거쳐 해병과 육군으로 신분을 바꾸어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인천지구 학도의용군은 클라우제비츠가 언명한 ‘열정’을 보여준 국민의 전형적인 예로 인식될 수 있다. 그들은 국가를 위해 서슴치 않고 자신을 희생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이들 인천의 학도의용군들은 역경 속에서 서로를 돌보면 지역 사회에서 형성된 형제애가 어떻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휘될 수 있는지 증명해 보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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