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한국전쟁 시기 북한이 군비 수요를 어떻게 충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중국과 소련은 각각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추적한 연구이다. 전쟁 전 북한의 군수산업은 태동기에 있었다. 북한은 소련의 지원에 힘입어 65호공장과 같은 군수산업의 기초를 갖추었지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북한은 전쟁준비에 필요한 대부분의 군수품을 소련으로부터 얻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의존하여 전쟁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장기간의 전쟁을 준비할 수 없었다. 작전 기간을 약 한 달로 상정한 북한 지도부는 약 두 달 분의 소모성 물자만을 확보하는 등 전쟁 수행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만을 갖추고 전쟁을 개시했다. 그러나 개전 직후 미군의 참전이 결정됨에 따라 북한 인민군은 예기치 못한 장기전과 총력전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산업분야의 전시전환을 위한 조치들이 급조되었지만, 미공군의 폭격에 의한 보급선의 위협과 같은 문제에 적절히 대처하는 데는 실패했다. 1950년 7월에서 10월까지 미공군의 폭격에 의해 이미 상당한 손실을 입은 북한의 산업기반은 10월의 후퇴를 거치면서 거의 완전히 붕괴되었다. 북한 지도부는 산업시설의 조직적인 소개를 기도했지만 이는 대체로 성공하지 못했다. 1950년 10월의 후퇴 시기 이후 북한의 산업생산 능력은 전쟁 전의 10% 수준까지 떨어졌다. 전쟁수행은커녕 생존 자체가 의문시되는 상황에서 전쟁을 지속시킨 것은 중국과 소련의 군사·경제적 지원이었다. 소련은 중국과 북한이 필요로 하는 무기 대부분을 공급함으로써 전쟁 지속에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951년 6월 이후부터는 무기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조기종전을 희망한 김일성을 고통스럽게 했다. 이에 반해 중국은 인민지원군을 참전시킨 것 외에도 만주를 후방기지로 제공하고,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투입해 북한의 국가경제를 지탱했다. 비록 절대적인 지원 금액에서는 중국이 소련에 못 미쳤지만, 지원 과정에서 보인 양국의 상반된 태도는 김일성에게 깊은 인상을 남김으로써 전후 북―중·북―소 관계의 전개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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