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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英祖朝 東村派의 交遊樣相과 交遊詩 -吳瑗· 南有容· 李天輔· 黃景源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Dongchonpa [東村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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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안순태
소속 및 직함 서울대학교
발행기관 한국한시학회
학술지 한국한시연구
권호사항 (21)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185-217
발행 시기 2025년
키워드 #東村派   #吳瑗   #南有容   #李天輔   #黃景源   #英祖朝 四家   #文酒會   #詩酒會   #雅會   #鐘巖   #東亭   #四郡   #天機   #안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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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고는 英祖朝 ‘東村派’의 실체를 究明하고 그 핵심 구성원들의 교유 양상과 교유시에 대해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東村派’는 李圭象에 의해 붙여진 이름으로 영조조에 吳瑗·南有容·李天輔·黃景源 등을 중심으로 東村에 거주하면서 함께 어울리던 일군의 문사들을 가리킨다. ‘東村派’는 문학 유파라기보다는 교유집단의 성격이 두드러진 칭호다. 그리고 이 교유집단의 모임은 吳瑗·南有容·李天輔·黃景源 등 이른바 ‘英祖朝 四家’라 불리는 핵심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지속되기는 했지만 거기에 참여한 인물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또한 이들은 주로 吳瑗의 鐘巖 東亭에 모여 시주회를 가졌다. 따라서 ‘東村派’는 東村에 거주하던 吳瑗·南有容·李天輔·黃景源을 핵심 구성원으로 하며 1724년 내지 1773년경까지 鐘巖 東亭을 중심으로 모임을 가졌던 교유 집단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동촌파 모임을 형성 및 정착기, 전성기, 침체기의 세 시기로 구분하여 각 시기 이 그룹의 動態와 모임에서 이루어진 詩作들을 살펴보았다. 동촌파가 고정된 멤버와 빈번한 모임 횟수를 갖춘 교유집단이 된 것은 1724년 吳瑗과 南有常이 만나면서부터였다. 남유상의 아우 남유용도 이때부터 함께 어울렸고, 이윽고 이천보도 모임에 동참하였다. 그들은 빈번하게 종암 동정에 모여 文酒會를 가졌다. 이후 1728년 봄, 남유상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임은 한때 활기를 잃게 된다. 1732년이 되어 황경원이 모임에 가담하면서 吳瑗·南有容·李天輔·黃景源을 핵심 구성원으로 한 이 모임은 1740년, 오원이 죽을 때까지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 시기에 모임의 핵심 구성원들은 여러 차례 四郡을 함께 유람하기도 하고 北漢山, 貞陵, 冠岳山 등 한양의 승경지를 찾아다니며 文酒會를 가졌다. 吳瑗·南有容·李天輔 세 사람은 특히 자주 東亭에 모여 시를 지었으며 그때 지은 시를 시집으로 엮기도 하고 唐 이전의 시를 선발하여 시선집을 엮기도 했다. 1740년, 오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임은 침체기에 접어든다. 오원은 이 그룹의 중심 인물이었고 그의 종암 동정은 이 그룹의 주 모임 장소였기에 오원의 죽음과 함께 모임은 침체일로를 걷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예전과 같은 종암 동정에서의 성대한 문주회를 재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전성기 시절에도 함께 어울리던 吳瓚(吳瑗의 弟)이나 南公弼(南有常의 子)이 모임을 이어 나갔으며, 오원의 손자인 吳熙常이나 吳淵常에 이르는 19세기 초반까지 그 모임이 지속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東村派’는 문학 유파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공통의 문학적 구호나 특질을 선명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이 대체로 공감하던 바를 범박하게나마 정리하자면, 애써 꾸며서 시를 짓지 말고 天機를 그대로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시를 짓자는 것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결과적으로 그들 시의 대부분은 대체로 唐風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東村派’는 이처럼 ‘天機’를 중시하던 조선 후기 한시의 흐름을 비교적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교유 집단이면서, 文酒會(雅會)를 통해 시를 지으며 고상한 취향을 지향하던 흐름이 이미 18세기 초부터 나타났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집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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