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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19세기 말 평안북도 구성군 家戶의 구성과 거주 양태

Residence Status of Dwelling Unit Structure and Residence Status in Kusong-gun Pyeonganbuk-do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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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정주
소속 및 직함 단국대학교
발행기관 한국역사민속학회
학술지 역사민속학
권호사항 (43)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325-348
발행 시기 2025년
키워드 #광무호적(光武戶籍)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호적   #동성 촌락   #이정주
조회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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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이 논문은 1898년에 만들어진 평안북도 구성군 내동면의 호적을 분석한 것이다. 현재 남북으로 분단이 되어 있고 1898년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행정구역이 변동되었기 때문에, 구성군 내동면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 정보 파악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호적과 다른 기록을 종합하여 볼 때, 당시 내동면이 15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내동면 호적은 다소 무성의하게 작성되어 오류가 적지 않았는데, 여러 오류를 수정한 결과 호적에는 201戶, 男 565인, 女 450인, 합계 1,015인이 기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주민의 인구 분포를 살펴 보면 남성이 여성에 비해 26% 많게 나타난다. 이는 딸을 대부분 기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령 분포를 보면, 10세 이하 미성년자의 기재율이 낮았다. 성비가 높고 미성년자를 등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내동면 호적이 전근대 호적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사 결과 내동면의 호당 가족원 수는 5.05였다. 호당 가족원 수가 비교적 많았던 것은, 내동면이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어서 유동 인구가 많지 않았고, 1인 가구의 형태로 존재하는 상인이나 수공업자가 전혀 없었던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내동면은 다수의 동성 촌락과 소수의 일반 촌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가옥의 평균 규모가 크고, 1인당 평균 거주 면적이 넓은 동네는 대부분 동성 촌락이었다는 것이다. 내동면에 동성 촌락이 많았던 것은 이 지역이 유교적 성향이 강하였기 때문이었다. 내동면 호적에서 가족은 철저히 부계 직계 친족으로 구성되었고, 딸들은 잠재적 출가외인으로 여겨 일체 기재하지 않았다. 시집온 여성들의 성씨나 외조의 본관도 기재하지 않음으로서, 가족 구성에서 여성을 배제하거나 가급적 평가 절하하려고 하였다. 호주의 직업은 모두 ‘農’으로, 祖와 父는 모두 ‘學生’이나 ‘幼學’으로 기재하였다. 내동면은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지역이었고, 이러한 지역적 특성이 내동면 호적의 보수성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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