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해방 전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해방기에는 미군정 관료, 작가, 번역가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월북 후 휴전회담에서 북측의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던 설정식의 경우를 중심으로, 통역/번역 체계로서의 냉전기 한국의 언어상황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첫째, 설정식이라는 한 시인의 면모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어 온 기존의 작가론적 시각을 넘어, 해방기 언어/문학상황을 구축한 중요한 요소인 영어를 문학어이자 정치어로서 이해해야 했던 영문학자의 복잡하고 불안정한 위상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둘째, 설정식에 관한 픽션이나 회고 등의 기록을 통해, 그가 보여준 정치적․사상적․문학적 위치들 사이의 어긋남이 이후의 평가 속에서 ‘문제적 개인’ 또는 ‘중간파’ 등의 수사로 봉합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북한의 남로당 공판을 모티프로 삼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픽션은 설정식의 ‘신뢰하기 어려운’ 위치를 통해 그를 양면적인 냉전의 에이전트로 표상하였으며 이를 통해 적과 동지를 구별하기 힘든 해방기 조선의 정치적 상황을 부각시켰다. 최태응은 설정식에 관한 회고에서 그를 ‘중간파(회색)’로 묘사했는데, 이는 설정식이 실제로는 미군정 스파이가 아니었음을 강조하면서도 그의 ‘월북’이 지니는 실정성을 해명해야 하는 곤란함을 해소하는 방식의 하나였다. 최태응은 설정식의 영어능력이 어떤 식으로든 조선의 정치상황에 동원됨으로써 자신의 ‘문학’을 파괴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데, 이는 ‘영어’와 ‘영문학’이 양립할 수 없다는 냉전기 언어상황에 대한 인식이 1960년대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설정식의 마지막 공적 활동은 휴전회담에서 북측(인민군) 대표의 말을 통역하는 것이었다. 설정식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건 중 하나인 티보 메러이의 회고는 적대적이고 억압적인 냉전 상황에서 통역자의 수행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 글은 끝으로 설정식이 참여한 휴전회담 기록과 그에 관한 회고를 겹쳐 읽음으로써 통역/번역을 통해서만 성립되는 냉전적 의사소통 상황의 특징과, 그 속에 은폐된 수많은 불연속점을 환기하는 주체로서 통역자가 지닌 수행성에 대해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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