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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高句麗의 南進과 對新羅 領域向方

The Southward Advance of Goguryeo and the Territorial Trend with Silla in the late 6th~early 7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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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장창은
소속 및 직함 국민대학교
발행기관 민족문화연구소
학술지 민족문화논총
권호사항 (55)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407-448
발행 시기 2025년
키워드 #평원왕   #영양왕   #수   #왜   #장안성   #온달   #아단성   #북한산성   #우명산성   #장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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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고구려는 6세기 중반의 위기상황을 570~80년대 체제정비와 대외관계의 개선으로써 타개해 나갔다. 평원왕은 태자 책봉을 통해 왕위계승 분쟁을 사전 차단했으며, 전렵 활동으로 군사권을 공고히 했고, 승관제를 정비함으로써 왕권을 뒷받침하는 이념적 토대를 구축했다. 또한 長安城을 축조했고, 완공 이전에 천도를 단행하여 방어체제에 만전을 기했다. 고구려와 隋의 관계는 590년 수 文帝의 새서와 嬰陽王(590~618)의 화답이 이어지면서 592년 무렵 우호적으로 전환되었다. 남방에서는 577년 이후 위덕왕이 대신라 보복전을 전개하여 신라 서변의 추풍령로를 압박하였다. 고구려는 570년대 이후 왜와도 관계를 개선하였다. 591년 11월~595년 7월까지 왜는 九州[筑紫]에 2만군을 주둔시켰다. 이는 신라군을 남쪽 방면에 묶어두는 효과를 거두었다. 영양왕은 온달을 보내 신라에게 빼앗겼던 鷄立嶺과 竹嶺 서쪽의 땅을 되찾고자 했다. 온달 南征軍과 신라군의 격전지는 阿旦城[단양군 영춘면 온달산성]이었다. 전투의 시기는 장안성 공사 완공 이후와 수와의 관계를 고려해 593~594년으로 추정했다. 온달은 영서와 중부내륙을 남북으로 이어주던 죽령로를 경유해 단양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아단성 전투의 패배로 도리어 신라가 죽령로를 통해 북진하는 기회를 맞았다. 신라는 7세기 초반까지 북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핵심 거점인 춘천 지역까지 장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고구려는 603년 8월 北漢山城[아차산성]을 공격하였지만 신라군에 패했다. 신라는 북한산성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604년 南川州를 폐지하고 北漢山州를 다시 설치하면서 한강 이북의 방어체계를 본격적으로 마련했다. 그러나 608년 2월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고 牛鳴山城[춘천 일대]을 내주고 말았다. 다만 우명산성 전투로 되찾은 고구려의 죽령로 영유에 대한 주도권은 지속되지 못했다. 612~614년 고구려가 수와 국운을 건 전쟁을 치루는 틈에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 500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가 608년에 차지한 우명산성은 신라에 다시 귀속되었고, 신라는 한강 본류 방면에서도 북한산성을 교두보로 하여 북방진출을 가속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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