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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해방 후 사할린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정체성

Korean community formation and ethnic identity After the liberation in Sakha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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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황선익
소속 및 직함 국민대학교
발행기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권호사항 (77)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267-298
발행 시기 2025년
키워드 #이산   #디아스포라   #귀환   #큰땅사람(고려인)   #북한   #영주귀국   #사할린   #황선익
조회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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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전쟁은 한인을 사할린으로 동원했고, 전쟁의 종결은 이들을 사할린에 고립시켰다. 2차대전 종결과 함께 이어진 혼돈과 충돌의 시대에 그들은 식민모국으로부터도, 고국으로부터도 보호되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동아시아 전후처리 구도에서 냉전의 볼모가 되었다. 제국주의 팽창과 전쟁의 시대에 사할린의 한인들은 동아시아 접경민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민족과 국적의 불일치, 서로 다른 사회체제와 사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사할린 한인의 다층적 경험을 구술자료를 통해 살펴보고자 했다. 식민지시기 많은 한인들이 수많은 사연으로 가족과 떨어져 사할린에 가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면 이산도 끝날 것 같았지만, ‘해방’은 또 다른 가족 이산, 민족 이산의 배경이 되었다. 소련군이 진주하기 이전 사할린은 ‘학살’과 이에 대한 공포, 위협이 난무하던 공간이기도 했다. 한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되는 가운데, 소련군이 들어오자 사할린의 질서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조센징’이라고 멸시하고, 폭행을 일삼던 일본인들은 전쟁이 끝나자, 한인들에게 꼼짝을 못했다. 어떤 면에서 전쟁이 끝난 사할린은 ‘자유’의 공간이며, ‘평등’의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힘센 일본인을 몰아낸 소련사람은 한인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사할린의 한인은 소련체제하에서 소수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성실한 한인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은 면하였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차별 속에서 국적 선택의 강요를 이겨내야 했다. 소련정부는 사할린 한인을 통제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을 사할린으로 대거 이주시켰다. 사할린의 한인들은 이들을 ‘큰땅사람’이라 불렀다. 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하며, 러시아어에도 능숙한 큰땅사람들은 사할린 한인을 통제하는 또 하나의 권력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해방공간의 수난은 사할린 한인의 정체성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사할린 한인 1, 2세대는 여전히 한국어를 능통하게 쓰며, 한국적 정서를 상당부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이중 언어가 모두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일쑤였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언어적 ‘이방인’이었다. 그들은 언어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소수자로서의 삶을 감내하고 있었다. 사할린에서의 삶은 고향으로의 귀환을 고대하는 인고의 시기이자, 고단한 삶을 포기하는 절망의 시기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사할린에서의 삶은 버텨낸 후 영주귀국을 했지만, 또다른 많은 이들은 고향에서의 차후의 삶을 꿈꾸며 죽음을 선택했다. 수많은 충돌과 선택의 기로 속에서 사할린 한인은 역사적 격변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그들의 일생은 그야말로 경계인이자, 소수자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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