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후반 성창환을 중심으로 이상구, 유창순, 이정환, 이동욱, 이창렬로 구성된 ‘사상계 경제팀’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사상계 경제분야에 논설을 기고하며 �사상계�의 개발 담론을 주도했다. ‘사상계 경제팀’은 국가주도의 산업화정책과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급속한 공업화와 경제성장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사상계 그룹은 이를 4․19 혁명을 계승한 민족혁명으로 평가하고, 군사정권에 대한 참여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군사정권이 추진한 경제개발계획은 주요 기간산업(전력․석탄․정유․비료․제철)과 노동집약적 산업에 치중하고, 소비절약과 내핍을 강조하는 동시에 외자보다는 내자, 특히 정부 재정부문의 역할을 강조하며7%대의 높은 경제성장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상계 경제팀’의 개발 담론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군사정권은 쿠데타 직후부터 최고회의 및 각 부처에 광범위한 자문단을 두어 민심을 읽고, 경제정책의 골격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상계 경제팀’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에 호응하였던 것은 군사정권이 이들이 구축해온 개발 담론을 적극적으로 전유해가고 있었기때문이었다. 사상계는 분명 반공 민족주의, 근대주의로 가득 찬 텍스트이다. 그러나20세기는 민족주의와 근대주의의 시대였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직후 냉전과 분단, 전쟁과 전후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 휘말려 있던 한국 지성계가민족주의와 근대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어쩌면 그 시점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우리는 한국의 지성계가 축적해온 개발 담론이 군사정권의경제개발계획에 일정하게 반영되면서 자본과 시장 주도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국가 주도의 계획이라는 방식으로 정초된 점에 주목해야 한다. 6․25 전쟁 후와 군사정권 등장 후 균등경제와 공익실현을 위해 마련되었던 헌법 조항들이 대폭 손질됨으로써 제헌헌법에서 국가에 부여되었던 역할 중 공공성의 영역은 현저히 축소되었고, 국민생활은 자본의 논리와 생산력 지상주의에 밀려날 수밖에 없는 취약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생활의 안정과 향상, 복지국가의 실현이라는 국가의 역할은 여전히 군사정권 경제개발계획의 기본 목표로 표방되고 있었다. 이는 적어도 군사정권이 국민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변화와 혁명을 표방할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일종의 ‘수동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군정연장과한일협정 반대투쟁을 통해 군사정권과의 경계선을 찾은 사상계를 비롯한비판적 지식인들은 이제 군사정권에 의해 전유된 개발담론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대항담론을 만들어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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