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제1차 國共合作의 상징으로 1924년 중국 廣州에 건립된 黃埔軍官學校는,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 양측의 군사 지도자와 무수한 혁명가를 배출하였고, 동방의 여러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의 청년들을 흡인하여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본고는 식민지기 韓人들이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받은 사상적 영향과 인맥, 그리고 항일전쟁기까지의 한중연대 활동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았다. 황포군관학교는 이전의 군사교육기관과 달리 정치교육이 강화되었으며, 특히 周恩來가 정치부 주임으로 활동하면서 공산주의 세력이 증대하였다. 국민혁명시기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한 많은 韓人 청년들은 三民主義와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였고, 여러 정치활동에 참가하였다. 楊林 등 황포군관학교의 韓人청년들은 周恩來의 영향 하에 國民革命의 北伐뿐 아니라 공산주의 활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7년 제1차 國共合作이 결렬되면서 황포군관학교 한인 청년들이 중국공산당을 따라 중국국민당의 노선과 상반된 길로 나아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 한인 입교생들은 國共合作에 기초한 민족협동전선 구축을 위한 진보적 혁명관을 형성하였고, 계급혁명보다는 國民革命 이념의 범주 안에 머물렀다. 대표적으로 의열단 단장이던 金元鳳은 단원들을 이끌고 黃埔군관학교 제4기로 입교하여, 제국주의로부터 해방과 사회변혁을 위한 교육을 받고 졸업 후 중국의 國民革命에 동참하였고, 항일운동을 국공합작 이념에 바탕을 둔 민족협동전선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황포군관학교 출신 韓人들은 김원봉과 같이 중국국민당과 연계를 가지면서 민족협동전선을 추구하였거나, 중국공산당에 참여하여 무장투쟁 전개하였거나, 모두 黃埔군관학교에서 배운 군사기술과 정치사상, 인맥이 그들 활동에 큰 무기가 되었다. 1937년 7・7사변으로 중일전쟁이 폭발함으로써 제2차 國共合作이 이루어지자, 한중간 공개 항일연합전선이 결성되고 韓人 독립운동가들도 좌・우파가 연합하였다. 김원봉과 의열단 단원들은 황포군관학교 인맥을 배경으로 蔣介石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건할 수 있었다. 또한 황포군관학교시기 周恩來를 매개로한 韓人청년들과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는 이후 1930년대 만주지역 韓人의 공산주의운동 및 延安 항일근거지 활동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두 번째 국공합작도 결렬되면서, 중국의 국민당・공산당과 연대한 한인 혁명가들은 중국에서 민족협동전선을 수립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과 공산당 측으로 나누어졌다. 黃埔군관학교 출신 韓人혁명가들은 한중 연대활동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과 결렬을 반복적으로 경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공 양측으로 갈라진 韓人들의 황포군관학교 인맥은, 1945년 해방 후 분단을 겪으면서 남북한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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