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는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함으로써 군정이 실시되었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일제 말기에 파괴된 교회를 재건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을 뿐 아니라 남한 지역에는 기독교에 우호적인 미군, 북한지역에는 비우호적인 소련군의 군정 실시로 큰 변동이 일어났다. 소군정아래 공산세력의 탄압에 맞서던 북한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견디지 못하고 남한 지역으로 대거 월남하였다. 이런 월남은 한국교회와 기독교세력의 동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김구․김규식 등 기독교 지도자들의 귀국은 기독교세력에 정치사회활동에 큰 계기가 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사회활동의 거점이 될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또한 한국 기독교인들은 적대적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 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이 부여한 시대적 소명이며, 민족을 구원하는 지름길로 인식하였다. 이렇게 해방정국 건국과정에서 기독교세력의 자유민주주의론은 국제정세와 맞물린 국내정세 변동, 그리고 기독교적 국가건설론이 결합되어 형성되었으며, 기독교세력의 실천적 논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해방이후 기독교세력의 국가건설운동은 먼저 반탁운동과 독립촉성운동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이들 운동을 통해 국가건설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논의가 별 소득없이 결렬되었다. 빠르게 공산세력의 중심으로 안정되어 가는 북한에 비해 남한지역은 정치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에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통해 국가를 건설하자는 이승만세력의 단독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반발해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 및 남북협상을 주도하다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인민민주주의노선을 수용한 김창준을 비롯한 세력은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반대하며 적극 좌우합작가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이후 북한으로 월북하였다. 대다수의 한국교회와 기독교세력은 이후 유엔 감시하 총선거에 적극 참여하였고, 건국된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등용되어 새로운 국가건설에 노력하였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