숄로호프의 「고요한 돈」은 러시아 혁명 전후의 이야기를 담은 대하소설이다. 러시아 남부 돈강 유역에 있는 타타르스키 마을이라는 가공의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젊은 남녀의 정열적인 사랑과 1차 세계대전,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으로 이어지는 전쟁 상황을 화폭에 담고 있다. 돈 카자크의 활기 넘치는 생활과 거기에 배어 있는 토착문화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의 행동을 통하여 혁명의 원인과 배경, 그 전개 과정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맞먹는 서사시적 규모를 갖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소설은 전체가 8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러시아에서는 네 권으로 간행되었다. 「고요한 돈」은 일찍부터 한국에 소개되었다. 작품이 완간되기도 전인 1930년대에 일본어 번역판이 나왔으므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소설을 쉽게 구해볼 수 있었고 백석이 우리말로 번역한 판본도 1949년과 1950년에 1권과 2권이 간행되었다. 소설이 1940년에 완간되었음을 생각하면 매우 빠른 반응이지만 백석 번역본이 북한에서 나왔고 출간 직후 전쟁이 발발하고 그 뒤에는 이념 대립의 상황이 지속되어 남한의 독자들에게는 198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소개된다. 북한과 사회주의권 서적에 대한 금제가 풀린 때를 맞아 출판사 일월서각과 문학예술사에서는 거의 동시에 「고요한 돈」 전체를 일곱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일월서각본은 일본의 횡전서수(橫田瑞穗)가 번역한 판본을 이중번역한 것이고 문학예술사본도 대부분의 문장표현이 일월서각본과 같아서 번역텍스트로 일본어본을 이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후에도 「고요한 돈」은 몇 차례 더 번역된다. 동서문화사와 청목사에서 똑같이 작품 전체를 두 권 분량에 담아냈다. 그러나 이렇게 여려 차례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질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오랫동안 실전된 것으로 여겨졌던 백석 번역본이 발굴되었다. 남경대학 윤해연 교수가 북경국가도서관에서 찾아내 고려대 최동호 교수에게 복사본을 전달함으로써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백석본 「고요한 돈」은 다른 한국어 판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번역의 질이 뛰어나다. 문자를 다른 문자로 옮기는 기호전환의 작업만을 한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에 바탕을 두고 창작에 준하는 노력을 기울여서 원작의 맛과 빛깔을 되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 번역을 통해 볼 때 백석은 원작이 ‘짤막한, 흔히 격렬하게 집중된 장면을 주욱 나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각각의 장면이 지닌 고유의 특징을 번역본에 구현하기 위해 심사숙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자연묘사에는 서정적 분위기가 주어지고, 사건과 행동의 장면들은 객관묘사의 방법으로 처리되며, 짧은 시구와 같은 문장이나 문단을 통해 시적 표현을 구사한다. 이 서로 다른 단편들이 자기 색깔과 목소리를 드러냄으로써 소설의 형상은 입체적인 세계가 되고 화음을 지니게 된다. 이와 같은 양상은 다른 판본들과 비교하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서정적인 분위기를 살려야 할 곳이나 시적인 표현이 이루어져야 할 곳에서도 길게 늘어지는 산문적 묘사가 이어지고, 정작 객관묘사가 행해져야 할 곳에서는 주관적 해석을 가함으로써 작품을 이루는 각 단편들의 고유한 성격을 중화시켜버리는 것이 이중번역본들의 특징이다. 더욱이 백석 번역 「고요한 돈」은 생활의 냄새가 짙게 묻어나는 토속어를 사용하고 우리말에 고유한 어법을 구사함으로써 작품의 예술적 향기를 드높이고 있다. 우리말에 특징적인 형용 표현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상태나 동작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갈걍갈걍’, ‘왱강뎅강’ 같은 반복어를 효과적으로 도입함으로써 문장과 문단, 나아가서는 서사구조 전체에 리듬을 부여하고 있다. 그 분위기의 조성에 기여하는 것이 전통적인 비유법이나 속담, 격언 등을 이용하는 인유법이다. 이러한 여러 표현기법 가운데서도, 그리고 번역이라는 제한적 조건 속에서도 반복어의 활용을 통해 작품 전체의 리듬을 조절하는 방법은 가히 예술적 혁신이라고 할 만하다. 백석 번역본이 기계번역과 차원이 다른 예술번역의 높은 품격에 이른 것은 그 예술적 혁신에 힘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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