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해방 직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사할린 한인 귀환을 둘러싼 한국, 일본, 소련, 북한의 정책과 그 논리를 구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사할린 한인의 이주는 사할린 개발이라는 일본제국의 정책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또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징용공이 되어 강제동원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과 함께 그들은 사할린에 버려졌다. 사할린을 점령한 소련은 처음에는 사할린 한인을 북한으로 귀환시키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귀환으로 부족해진 노동력 때문에 소련 당국은 사할린 한인에게 시민권과 국적을 부여하는 정주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북한 또한 소련과의 정책적 연계 속에서 소련의 사할린 한인의 정주정책에 동조했다. 부족해진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북한 노동자를 새롭게 사할린에 파견하거나, 기주 사할린 한인들에게 북한국적을 부여해 사할린에 정주하도록 했다. 소련과 북한은 사할린 한인을 노동력으로 공유하면서 ‘국민’으로 포섭하여, 미국과 일본 한국과의 이데올로기 전쟁 속에서 체제 우위를 점유하려고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패전 후 일본은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면서 일본인의 경계를 새롭게 구획했다. 사할린 재주 일본인의 귀환 정책 속에서 일본제국에 의해 강제이주 당한 사할린 한인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했다. 국적과는 달리 혈연 상의 일본여성과 혼인관계에 있는 한인과 그 가족은 일본인의 ‘동반자’라는 자격으로 귀환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조항은 철저하게 ‘일본 국민주의’에 입각한 것으로 제국일본의 호적조항으로 인해 배제되었던 한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을 ‘일본인’의 범주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의 경우, 이승만 정권은 사할린 한인의 문제를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의 문제로 제기하지 못했다. 단지 북한과의 체제경쟁 속에서 일본의 ‘재일조선인 북송문제’를 비난하면서 사할린 한인의 한국 귀환을 요구했다. 이러한 입장은 사할린 한인 문제를 식민지 지배책임의 문제라기 보다 냉전의 문제로 치환되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 또한 사할린 한인의 문제에 무관심과 무성의로 일관했다. 한국과 일본의 이러한 태도가 사할린 한인을 방치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사할린 한인 귀환문제가 한국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66년부터이다. 이것도 한국정부의 일본에 대한 식민지 지배 책임에 대한 문제제기라기 보다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에 대한 일종의 면피성 대응과 일본의 ‘재일조선인 북송문제’에 대한 대응적 카드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1964년부터 시작된 한일협정 반대운동으로 약화된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반공과 반일 감정을 일으키는 기재로도 사용했다. 소련과 북한이 노동력으로써 사할린 한인을 ‘국민’으로 포섭한 것에 비해, 한국정부는 사할린의 한인을 ‘국민’으로 포섭하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정부는 그들을 ‘한국인’의 경계에 두고 끊임없이 사상성을 감시하고 통제함으로 한국의 정통성,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타자’로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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